- 코스프레

- 부상 소재 주의



  어느 날 카게야마는 제대로 걸을 수 없게 되었다.


  어릴 때부터 카게야마의 인생에는 배구만 가득했다. 일어나자마자 머리맡의 공을 만지는 걸로 하루를 시작하고, 등교하며 열심히 체력을 단련하고, 수업 시간에도 공부보다는 배구 생각을 먼저 했다. 그에게서 일과 중 가장 행복했던 건 부활동 시간에 부원들과 배구를 하는 일이었다. 존경하던 사람도 배구를 잘하는 사람이었고, 가장 좋아했던 장소도 배구 코트 위였다. 하지만 그런 카게야마는 더 이상 코트 위에 서지 못한다.


  츠키시마는 제 옆에 누워 낮잠을 자는 카게야마의 날렵한 콧날을 검지로 살짝 쓸어보았다. 카게야마는 자고 있으면서도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미간과 이마에 깊은 골짜기가 생겼다. 츠키시마는 그 골짜기를 물로 메우듯 살살 건드렸다. 카게야마는 간지러웠던 건지 고개를 휘휘 저으며 잠에서 깼다.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 시작된 인연이었다. 두 사람은 같은 배구부의 앙숙으로 시작해 대학도 같은 곳으로 가게 되었고, 어쩌다 보니 동거를 하게 되고 지금은 9년째 연인으로 지내고 있다.


  "츠키시마, 번역은 다 한거야?"

  "대충."


  카게야마는 소파에 겨우 걸터앉아 저린 제 허벅지를 만지작 거리며 츠키시마에게 물었다. 츠키시마는 전기 포트로 끓인 물을 두 머그잔에다 붓고 저으며 양지바른 자리에 앉아 바깥을 바라보는 카게야마에게 대답했다. 대충, 했지 뭐.


  츠키시마는 전국의 여러 유명한 대학에서 스포츠 전형으로 입학 추천이 들어왔지만, 대학도 그냥 평소에 하고 싶었던 영문학과에 들어갔고 그 이후에도 제대로 된 배구를 한 적이 없었다. 하지만 카게야마는 달랐다. 대학도 당연히 체육학과로 들어갔고, 학교 배구부에서도 세터를 맡았다. 그리고 국가대표 활동도 했었고, 연습이 없거나 조금 한가한 주말에는 배구 경기를 보러 갈 정도로 열정이 넘쳤다. 대학교 2학년이 끝나갈 때 즈음 츠키시마는 카게야마에게 물었다. 너는 그렇게도 배구가 좋나 봐. 카게야마는 손에 테이핑하면서 츠키시마에게 당연하다는 듯이 답했다. 내 인생의 전부인걸.


  그러다 불과 2년 전, 카게야마는 불의의 사고를 당했다. 티비 속 뉴스에도, 인터넷 기사에도 카게야마의 이야기가 가득했다. 국가대표 카게야마의 교통사고. 배구의 제왕, 더는 코트 위에 서지 못하는 건가. 앞으로 일본 배구의 미래는. 카게야마, 의식 돌아와. 그날 츠키시마는 집에서 번역 일을 하다가 놀라서 울며 카게야마가 있다는 병원으로 맨발로 달려갔었다.


  "제왕."

  "응."

  "이제는 이렇게 불러도 화도 안내는구나."


  뭐, 다 옛날 별명이니까. 카게야마는 오랜 시간 동안 수술을 받았고, 츠키시마는 밖에서 초조하게 기다렸다. 한여름의 뜨거운 아스팔트 위를 신발도 없이 뛰어서 잔뜩 붓고, 더러워진 발로 츠키시마는 카게야마를 생각하며 울었다. 아, 카게야마. 카게야마. 네 다리는, 다리는.


  카게야마는 혼자 1인 병실을 쓰며 틈만 나면 창밖을 바라봤다. 창문을 향해 손을 쭉 뻗어보기도 하고, 손가락을 꼼지락대기도 했다. 그러다 츠키시마가 병실에 들어올 때마다 고개를 돌려 은은하게 웃기도 하고, 또 두 손에 배구공을 들고 이리저리 굴려보기도 했다. 하지만 카게야마는 다리를 쓸 수 없었다. 하필이면 많고 많은 신체 부위 중에 하필이면 가장 중요한 다리가 문제였다.


  "나 얼마동안 잔거지?"

  "한 30분."

  "그럼 나도 일 좀 해야겠다."


  카게야마는 츠키시마가 타 준 커피를 다 마시지도 않고 옆에 있는 간이 탁자 위에 올려다 두었다. 여전히 뜨거운 컵 아래 유리로 뿌옇게 김이 서리는 것이 보였다. 츠키시마는 머그잔에 입을 갖다 댔다. 시선이 흐릿해졌다. 츠키시마, 나 책상에 좀 데려다줘. 김이 서린 안경을 닦아 다시 썼더니, 카게야마가 애매한 자세로 소파에 앉아서 츠키시마를 향해 두 팔을 벌리고 있었다. 츠키시마는 컵을 내려놓고, 좋지 않은 표정으로 카게야마에게 다가가 자신이 안아주길 바라는 그 몸을 조심히 끌어안았다. 예전보다 야위고 가벼웠다. 근육 다 빠졌네. 그렇지, 뭐.


  퇴원한 이후로 카게야마는 매일 침대에 누워 지냈다. 츠키시마는 지나치게 조용한 카게야마가 익숙하지 않았다. 고등학생 때나 심지어 대학생이 되어서도 제왕이라 부르면 늘 조용히 하라고 화내던 카게야마가 이제는 아무렇지도 않게 그걸 받아들이게 되었다. 물론 애정을 기반으로 하는 말이지만, 조금이라도 신경을 긁는 소리를 하면 다짜고짜 소리부터 질렀었는데. 사고 이후의 카게야마는 츠키시마 보다 더 고요하고 차분해졌다.


  츠키시마는 영어 번역일을 하고, 그를 따라 카게야마는 한국어를 공부해 요즘 번역을 하고 있다. 요즘은 한국의 신간을 번역하는 일을 맡게 되었는데 곧 있으면 마감이라 잠깐 쪽잠을 자다가도 금세 일어나곤 했다. 츠키시마는 카게야마를 책상 앞에 앉혀주고 아까 마시던 커피와 곁들여 먹을 비스킷을 몇 개 옆에 놓아주었다. 고마워. 방문을 닫아주면서 츠키시마는 예전보다 작아진 카게야마의 등을 바라보았다. 나는 언젠가 코트 위에서 자유롭게 뛰며 행복해하던 카게야마를 싫어했었지.


  "좋아하기도 했고."


  이젠 뛰어다니지도 행복하게 웃지도 않는 카게야마를 한참이나 문틈 사이로 보다가 츠키시마는 거실의 소파에 기대어 앉아 티비를 보았다. 이리저리 채널을 돌려보았다. 애매한 시간대라 재미있는 프로그램은 없었다. 그저께 했던 드라마 재방송, 어머니가 좋아할 만한 요리 프로그램, 저번 달에 했었던 골프 대회 재방송, 아이돌이 나와서 춤추는 음악 프로그램. 츠키시마는 몇십 채널을 거슬러 올라가도 흥미로운 걸 찾지 못했다. 이제 열 번만 더 올라가 보고 아니면 꺼야겠다 생각한 찰나, 스포츠 채널에서 배구 경기가 한창이었다.


  카게야마가 듣지 못하게 츠키시마는 음소거 버튼을 눌렀다. 갑자기 조용해진 집안이 싸늘했다. 츠키시마는 오후의 따스한 햇볕이 내리쬐는 소파 위에 앉아 아무 말 없이 배구경기를 보았다. 자신이 학창시절에 했었던 미들 블로커도 보였고, 불과 2년 전까지 카게야마가 목숨 걸었었던 세터도 보였다. 어느 팀도 응원하지 않은 채, 츠키시마는 고요하게 티비 화면을 주시했다.


  "어."


  그런데 왼쪽 뺨이 축축해지기 시작했다. 안경에 물방울이 묻어 시야가 흐려졌다. 츠키시마는 손을 들어 올려 안경을 빼보았지만, 눈앞엔 여전히 물기가 가득했다. 물이 가득한 저 눈을 비벼보니 손등에 물이 한가득이었다. 눈물이었다. 안경을 다시 쓰고 화면 속 가득한 열정을 눈 안에 담았다.


  분명히 졸업하고 이제 배구는 그만이라 생각했었는데. 그렇게 좋아했지만 결국 이걸로 먹고 살긴 힘든 거니까, 라는 생각으로 멀리했던 배구였는데. 그리고 학창시절에도 부활동 그 이상은 아니라 생각했었는데. 츠키시마는 늘 그렇게 자신이 좋아하는 것에 냉정한 시선으로 바라봤었다. 그래서 카게야마가 싫었다. 한 가지에 미칠 듯이 매달려서 숨 막힐 정도로 달리는 카게야마가. 너는 어째서 고작 부활동에 그렇게 열심인 거야?


  - 좋아하니까.

  - 단순히 좋아한다는 사실만으로 그게 가능해?

  - 음. 가능하니까 이러고 있지.


  츠키시마는, 그래서 카게야마에 미쳐서 지금까지 온 건가 싶었다. 카게야마 한 사람에게 미칠 듯이 매달려서 지금까지 같이 살고, 모든 것을 함께 했나 싶었다. 츠키시마는 안경을 벗어 옆의 탁자 위에 올려두고 고개를 푹 숙였다. 중학교 3학년에 처음 카게야마를 알고, 벌써 10년이 넘은 세월 동안 츠키시마는 카게야마를 여러 번 싫어하고, 그것보다 더 많이 좋아하면서 너무나도 변해버렸다.


  자신이 싫어하면서도 좋아하던, 그때의 카게야마와 지나치게 비슷해져버렸다.


  저때가 그리워. 우리 두 사람이 코트 위에서 서로를 노려보면서도 함께 했던 그 시간이. 카게야마 네가 건강한 다리로 뛰어오르면 나도 그 모습을 따라서 더 높이 뛰어 보이곤 했었지. 땀에 가득 젖은 체육복을 벗고 빳빳하게 마른 교복을 갈아입으며 우리는 서로의 벗은 몸을 보며 부끄러워했었고. 남들 다 갈 때까지 기다렸다가 몰래 손잡고 가다가 구석에서 뜨겁고 아찔한 키스도 했었고. 내가 먼저 다가가면 너는 늘 부끄러워하며 뒤로 내빼면서도 입술은 날 향해 다가왔었지. 배구는 줄곧 좋아해 왔지만, 처음으로 그 소중함을 깨달았던 그 날, 땀 가득 흘리며 손잡아오던 네가 옆에 있어서 나는 정말로 행복했었는데.


  츠키시마는 옆 탁자에서 티슈를 뽑아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아내고, 카게야마의 다리와는 다른 멀쩡한 두 다리로 걸어 본인의 옷장 앞에 섰다. 졸업하고 벌써 한참이나 지났지만, 아직도 버리지 못한 그 시절의 교복이 눈에 들어왔다. 질리도록 3년간 입고, 두 번째 단추를 카게야마에게 건네었던 그 교복을 집어 들어 츠키시마는 품 안에 세게 끌어안았다.


  "카게야마."


  카게야마는 편하게 의자에 기대어 앉아 열심히 타자치고 있었다. 츠키시마는 교복을 끌어안고 카게야마의 뒤로 다가가 말을 걸었다. 얼마나 집중하고 있던 건지 카게야마는 츠키시마의 부름에 답하지 않았다.


  "토비오."

  "아, 응."


  카게야마는 성 대신 이름을 부르자 그제야 츠키시마를 올려다보았다. 츠키시마의 품에 낯이 익은 옷이 들려있는 것을 보자 카게야마는 무슨 일이냐는 듯 고개를 더 치켜들었다.


  "입어주세요."

  "교복?"


  제발. 츠키시마는 단 한 번도 카게야마 앞에서 제대로 운 적이 없었다. 처음으로 고백하고 사귀었던 날, 카게야마를 집에 데려다주고 나서야 기쁨의 눈물을 흘렸었다. 대회에서 우승하고 모두들 감격의 눈물을 흘렸지만, 츠키시마는 화장실 칸에 들어가서 혼자 입 틀어막고 울었었다. 그리고 심지어 카게야마가 사고를 당했던 그 날, 츠키시마는 수술이 마치기를 기다리는 내내 울었지만 정작 카게야마 앞에선 눈물을 보이지 않았었다. 그런데 지금의 츠키시마는 눈가가 시뻘겋게 부어서는 두 눈 가득 눈물을 쏟아내고 있었다. 카게야마는 크게 당황하며 츠키시마의 옷자락을 잡아 쥐었다.


  "대체 왜 우는…"

  "보고 싶어. 교복 입은 거, 보고 싶어."


  츠키시마가 포커페이스마저 잃어가며 제 앞에 주저앉아 우는 걸 보고 있자, 카게야마는 당황스러우면서도 어쩔 줄을 몰라 츠키시마의 머리를 그저 쓰다듬어주기만 했다. 교복을 입으라고? 지금 이 나이에? 카게야마는 갑자기 왜 이러나 싶기도 했지만, 츠키시마가 들고 있는 교복을 빼 들어 상의부터 입고 단추를 하나씩 잠그기 시작했다. 오랜만에 입는 교복의 촉감이 매우 이상했다. 평소에 입는 다른 셔츠와 다를 바 없었지만, 어렸을 때 입었던 교복이라 생각하니 더 그랬다.


  "츠키시마. 나 바지 좀 입혀줄래."

  "……."


  츠키시마의 도움을 받아 카게야마는 겨우 교복 바지 까지 입었다. 키는 크지만 츠키시마 보다 작았던 카게야마에게 츠키시마의 교복은 너무나도 컸다. 바지도 걷어 입어야 했고, 셔츠도 헐렁해서 보기 흉했다. 하지만 그보다도 츠키시마에게 더 안쓰럽고 속상해 보였던 건, 카게야마는 더는 두 발로 서있지 못한다는 사실이었다. 아무리 세워줘도 다리의 근육이 버티질 못해 주저앉는 카게야마의 모습이 자꾸만 머릿속에서 시뮬레이션처럼 지나갔다. 츠키시마는 헐렁한 교복을 입고 책상 의자에 앉아 내려다보는 카게야마의 모습을 보자 더 크게 울었다. 처음에는 얼굴이 잔뜩 빨개져서 눈물만 뚝뚝 흘리던 것이, 이제는 흐느끼며 바닥에 주저앉아 고개를 숙이며 울고, 또 고개를 쳐들어올려 카게야마의 모습을 보다가 입을 틀어막고 가슴을 치면서 울었다.


  "울지마."


  그 덤덤한 목소리를 듣고 있자니 눈시울이 더 붉어졌다. 눈물샘은 얼마나 울어도 마르지 않는 건지 자꾸만 새로운 눈물을 흘려보냈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츠키시마는 카게야마에게 침묵으로 답했다. 배구를 정말 사랑했던 네가 너무 그리워. 그 교복을 입고 내게 화를 내던 네가 너무 그리워. 나보다 배구를 더 좋아해도, 나는 너의 그 열정적인 모습이 이해 가지도 않았고 숨도 막혔지만, 지금 나는 그게 너무 그리워. 츠키시마는 입을 벙긋거리기만 할 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카게야마도 오열하는 츠키시마의 머리 위에 손을 얹고 묵언을 지켰다. 거실의 티비 속의 배구 경기도 아무 말 없이 진행되고 있었다. 땀 냄새 나도록, 아주 열정적으로.


  10년 전 두 사람이 그랬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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