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GM: Cayman Islands - Kings of Convenience

―오른쪽 클릭하고 연속재생








  누군가의 편지를 받는다는 건 최근 들어서 매우 드문 일이었다. 대학교를 졸업한 후로, 우편함에 고지서와 광고지 외의 다른 것이 꽂혀있던 건 처음이라 카게야마는 의아한 표정으로 편지를 꺼냈다. 하지만 새하얀 봉투 위 이름을 눈에 담은 순간, 그제야 편지의 존재가 이해가 가기 시작했다. 이와이즈미 하지메. 중학교 선배의 이름이었다. 봉투를 열지도 않았는데 그 이름을 눈으로 읽자마자 가물가물했던 과거의 일들이 하나둘씩 떠올랐다. 동북에 있어도 늘 더웠던 미야기의 여름 바람과 잔뜩 달궈진 아스팔트 위로 피어오르는 아지랑이. 녹아내릴 듯 후덥지근했던 그 체육관과 이곳저곳에서 요란하게 울려 퍼지는 신발 끌리는 소리. 그 공간에서 코를 넘어들어오는 짜디짠 땀 냄새와 시선을 돌릴 때마다 잔상처럼 따라다니는 그의 모습. 그 모든 것들이 편지 봉투 속엔 잠들어 있었다.

  그러다 문득 떠오르는, 마지막으로 본 그의 뒷모습에 카게야마는 봉투 열기를 주저하다 끝내 내용물이 무엇인지 확인도 하지 않은 채 가방에다 넣었다.





열대야 熱帶夜




  그 날로부터 10년이 지난 어느 여름밤이었다.


  10년 만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카게야마는 시끌벅적한 술집 계단 앞에 서 있었다. 찾는 일행은 2층의 방에 있다는 종업원의 안내를 따라 계단을 오르려 발을 내디뎠지만 차마 쉬이 오를 순 없었다. 오랜만에 중학교 시절 함께 했던 선배들과 친구들을 만나는 것은 좋지만, 동시에 그를 마주하게 될 것이라 생각하니 조금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카게야마는 자각하고 있었다. 피하려면 피할 수 있었다는 것을. 약속 장소를 알려주는 이와이즈미의 문자에 다음날 출장이 있어 가지 못한다는 답을 했으면 됐는데, 억지로라도 이곳에 찾아온 건 본인이었다. 심호흡을 한 번 크게 내뱉고, 계단을 오르는 카게야마는 답답하게 차오르는 가슴께를 어루만졌다. 찡해져 오는 코끝을 어떻게든 진정시키며 문앞에서 서성였다. 


  "어, 카게야마?"

  "카게야마!"


  문고리에 손을 대고 망설이던 중, 누군가가 미닫이문을 밀고서 카게야마를 반겼다. 이와이즈미였다. 카게야마는 순간 당황해 인상을 썼고, 이와이즈미는 짖궂은 표정으로 카게야마의 미간에 손을 대며 말했다. 여전하구나, 카게야마 녀석. 인상 쓰는 거 하고는. 오랜만에 보는 얼굴이었지만 변함없는 것들은 여전히 그 자리를 지켰다. 말투부터 행동까지. 하지만 그 무엇보다도 그때 그 여름밤과 그 사람을 떠오르게 만드는 추억이, 이와이즈미의 얼굴에는 공존했다.

  연달아 떠오르는 그 사람의 말 하나하나에 살짝 움츠리며 시선을 피했다가, 이마에 맺힌 땀을 셔츠 소매로 대충 닦아내었다. 그러고서 손바닥에 가득한 땀마저 바지에 쓸어낸 뒤 자신을 향해 내민 이와이즈미의 손을 맞잡았다.


  "잘 지내셨어요, 이와이즈미 선배."


  선배. 그 단어를 입 밖으로 꺼낸 순간, 비로소 10년 만의 모임의 서막이 올랐다.



  "카게야마는 진짜 오랜만이네. 대학 졸업하고는 처음인가?"

  "배구는 여전히 하고 있는 거야?"


  오랜만의 마주한 얼굴들과 목소리는 하나의 커다란 방아쇠가 되어, 기억의 저편에 묻어두었던, 아직 죽지 않은 기억을 하나둘씩 일깨웠다. 나쁜 감정 없이 서로를 마주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일인지 그때의 카게야마는 몰랐다. 뒤를 돌았을 때 아무도 없다는 두려움은 그 자리에 서 있지 않은 자들을 원망하기에 당시엔 아주 제격인 감정이었을진 몰라도, 시간이 지난 지금 다시 생각해보니 모두 쉬이 넘겨버릴 수 있는 옛 감정에 불과했다. 잔뜩 엉켰던 킨다이치와 쿠니미와의 관계의 끈을 풀어낸 카게야마는 웃으며 술잔을 건네는 킨다이치에게 저도 활짝 웃어 보였다.


  아무리 기다려도 그는 오지 않는 듯했다. 적은 인원 속에서 그의 부재는 더없이 크게 다가오곤 했다. 어느 무리에 있든 언제나 튀었고 밝았던 그는 늘 본인보다 컸기에 올려다보아야 했다. 크나큰 존재라 우러러봐야 했던 그는, 닿을 수 없었던 사람이었다. 그래서 카게야마는 그의 이름을 차마 쉽게 입에 올릴 수 없었다. 그저 분위기를 따라 입에 댄 술잔에만 슬쩍 뱉어내 볼 뿐이었다. 그의 이름을 머금은 술은 입안에서 더욱더 쓰게 느껴졌다.


  "킨다이치는 미야기에 돌아갔다고 했었나. 용케 도쿄까지 왔네."

  "아, 때마침 이번 주말에 시간이 남았슴다! 또 다들 만나고 싶었으니까…."

  "그래. 그래도 이왕 모이는 거 고향에서 모였으면 좋았을 텐데, 못 온 녀석들도 많고. 사정 상 어쩔 수가 없었다."


  삼삼오오 테이블에 앉아 대화를 나누는 사람들 사이에서 카게야마는 그저 안주를 집어 먹고 있었다. 킨다이치와 이와이즈미의 대화를 들으며, 오이카와도 현재 미야기에 있어 오지 못했을 것이라고 지레짐작해보았다. 그리고 생각했다. 오히려 늦게까지 영영 오지 않는 편이 나을 수도 있겠다고. 아직 그의 얼굴을 다시 마주할 준비가 되지 않았기 때문에.

  오로지 그 생각 하나 때문에, 주변에서 오가는 대화의 갈피를 잡지 못한 채 젓가락으로 안줏거리만 깨작깨작 건드렸다.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쿠니미가 카게야마를 향해 물었다.


  "카게야마, 그러면 결혼식 때는 올 수 있는 거야?"


  결혼식이라는 말에 카게야마의 눈이 동그래졌다.


  "결혼식이라니?"


  공기 중에 울려 퍼진 의외의 단어에 카게야마는 다시 한 번 더 질문을 던졌다. 누구 결혼식인데? 잠자코 대화를 듣고 있던 이와이즈미는 술잔을 들다 말고 카게야마에게 물었다. 내가 보낸 편지 봉투 안 열어봤나, 카게야마? 거기에 오이카와 녀석 청첩장이랑 사진도 몇 장 보냈었는데. 질식할 듯 숨이 막혔다. 그 사람이 결혼이라니. 그 말을 분명 귀는 받아들였는데, 차마 머리는 받아들이지 못했다는 것처럼, 갑작스레 찾아오는 현기증에 머리가 깨질듯이 아팠다. 눈앞이 깜깜했다. 누가 결혼한다고?


  "오이카와 선배. 가을에 결혼하신대."


  카게야마는 침묵으로 입을 닦았다.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 * *




  "이번 합숙은 팀워크 향상을 위한 합숙이다. 코트 위에는 여섯 명이 선다. 무슨 말인지 잘 알고 있겠지. 절대로 배구는 혼자서 할 수 있는 게 아니란 뜻이다. 그리고 그 밖에 벤치, 관람석에서의 지속적인 지지가 있어야지만 비로소 좋은 결실을 보는 것이다. 다들 잘 알아들었겠지."

  "네!"


  아침에 문을 열고 나오면서부터 카게야마는, 습한 여름 분위기에 숨이 턱 하니 막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심호흡을 여러 번 하다 제대로 된 첫 숨을 끝까지 들이쉬자마자 온몸 가득 그 습한 것들이 가득 차고 들어왔고, 햇빛은 쨍하니 눈을 가려 앞이 보이지도 못하도록 만들었다. 운동장 한가운데에 서서도 그랬다. 길기만 한 코치의 설명과 옆에서 속닥이는 킨다이치와 쿠니미의 얘기를 흘려들으며, 카게야마는 무거운 눈꺼풀을 어떻게든 제대로 떠보려 노력했다.


  "토비오!"


  몸을 짓눌러오는 뜨거운 바람을 타고 그리운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카게야마는 그제야 눈을 똑바로 뜨고 앞을 주시했다. 저 멀리 운동장을 가로질러 달려가는 부원들이 보였고, 그 앞으로 손을 뻗으며 얼른 오라고 손짓하는 오이카와의 모습이 보였다. 안 오고 뭐 하는 거야, 다들 갔잖아. 정오의 따가운 일광 아래서 그는 눈이 부시도록 빛났다. 바람에 날리는 머리칼이 빛으로 물드는 모습이 보였다. 반사광에 눈이 따가웠지만 카게야마는 눈을 감지 않았다. 조금이라도, 짝사랑하는 그의 모습을, 더 오랫동안 제 동공 안에 담아내고 싶었다. 

  오이카와는 으레 앞에 있었다. 카게야마는 잠시만이라도 그의 얼굴을 더 보기 위해서 속도를 냈다. 하지만 그는 끝내 얼굴을 보이지 않았다. 그저 묵묵히 이와이즈미의 구령에 따라 앞을 향해 달릴 뿐이었다. 카게야마는 그를 조금이라도 옆에서 바라보고 싶어, 오로지 시선을 그의 뒤통수에만 겨냥한 채 달음박질했다. 하교하는 길도 같은 방향이 아니었고, 학년도 다르고, 좋아하는 음식과 취미도 다른, 교집합이라곤 오직 배구 하나뿐인 그의 곁에 있으려면 조금이라도 더 힘을 내야 했다. 조금만 더, 저 사람을 따라잡으려면, 내가 잘하는 수밖에 없어. 이마를 타고 더운 땀이 흘러내렸다.


  "아!"


  그러나 때로 모든 일은 마음처럼 되지 않는 법이었다. 무작정 그의 등만을 쫓았기에 바닥의 돌을 보지 못해 넘어져 버렸다. 딱딱한 돌을 밟고 앞으로 엎어지면서도 카게야마는 오이카와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점점 오이카와가 멀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생채기로부터 스멀스멀 새어 나오는 피 묻은 손을 그를 향해 뻗어보았다. 닿지 않았다. 잔 모래알에 쓸려 무릎도 까져 쓰라렸다. 등골을 따라 흐르는 땀을 느끼면서, 얼굴의 땀을 모래 묻은 손으로 닦아낸 후 카게야마는 바닥에 주저앉은 채로 울었다. 닿지 않았기에. 좋아하는 사람이, 닿으려야 닿을 수 없는 사람이었기에.


  "뭐 하는 거야?"

  "……."

  "안 일어나고 뭐 해."


  그를 향했던 시선을 바닥으로 떨군 채 엉엉 울던 카게야마의 머리 위로 오이카와의 목소리가 맴돌았다. 보지 않아도 알 법한 익숙한 목소리였다. 그렇지만 카게야마는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해를 가리고 있어 깊게 음영진 얼굴 아래로 뻗은 손만이 보였다.


  "너, 울지 말라고 했지. 고작 이런 걸로 울어?"

  "안 울겠습니다."

  "뒤처졌잖아. 빨리 일어나서 뛰어."


  매몰찬 그의 말에 카게야마는 차마 그가 내민 손을 잡을 수가 없었다. 손가락 끝이 까져 피가 맺혔지만, 그저 습관처럼 반바지에다 대강 닦아낸 뒤 무더운 여름 공기를 가르며 뜀박질할 수밖에 없었다. 그토록 그의 얼굴을 보고 싶었는데, 이번엔 도리어 의도적으로 그를 피하고 싶었다. 공통점이라곤 배구 하나뿐인 두 사람 사이에서, 그 이상을 바라는 것이 벅찬 소망이겠거니 카게야마는 되뇌었다.

  내가 울면 조금 다독여주고, 무릎이 까졌으면 걱정해주고, 남들에게 보여주는 그 다정한 얼굴을 내게도 보여줬으면 정말 좋을 텐데.

  그의 얼굴이 고팠던 카게야마는, 오이카와가 어떤 표정으로 뒤에서 달리고 있을지 속으로 상상해보며 조바심에 아랫입술을 잘근댔다. 또다시 숨이 턱하고 막혔다. 여름 탓인지, 그에 대한 생각 탓인지 모를 일이었다.



  "그래서 합숙 기간 동안 서로의 마니또가 되어주는 거야. 이것 또한 팀워크 향상을 위한 거니까 귀찮다고 넘겨버리지 말고, 서로를 위해 5일 동안 최선을 다해보자."

  "에, 어린애도 아니고 무슨 이런…."

  "오이카와, 조용히 해."


  퉁명스럽게 대꾸하는 오이카와는 이와이즈미로부터 종이 뭉치를 받아 모두에게 한 장씩 나눠주었다. 카게야마는 그가 제 앞에 설 때 살짝 긴장했다. 아까 못난 꼴을 보이고 나서 자꾸 신경 쓰다 보니 제대로 연습에 집중할 수 없어 또 호되게 혼났기 때문이었다. 늘 혼나고 나면 눈물을 보여서 한 소리씩 오이카와로 부터 듣곤 했는데, 이번에도 어김없이 마찬가지였다. 토비오 쨩은 아직 어린가 봐, 눈치도 없고 분위기도 못 읽고. 물론 종일 정신이 다른 곳에 있어 토스를 자꾸만 빨리 보내고, 스파이크도 제대로 못 친 건 잘못이었다. 다른 부원들의 연습에 방해된 건 역시나 제 잘못이었다. 하지만 카게야마는 왠지 억울했다. 누구 때문에 이렇게 우는 건데. 카게야마는 또다시 벅차오르는 눈물을 참아내기 위해 제 허벅지를 세게 꼬집었다.

  자. 오이카와의 싸늘한 목소리가 하얀 종이 위에 내려앉았다. 카게야마는 그걸 받으면서 고개를 푹 숙였다. 그의 뜨거운 손과 생채기가 가득한 제 손이 맞닿았다. 닿은 손가락이 따가웠지만, 도리어 데인 가슴이 더욱 아려서 그 아픔은 쉽사리 잊을 정도였다. 오이카와는 그 말 하나만 남긴 채 자리를 떴고, 그가 움직이자 텁텁한 땀 냄새와 함께 한여름의 온기가 카게야마의 감각을 흐렸다.

  카게야마는 또다시 제 허벅지를 꼬집었다. 자꾸만 눈물이 날 것 같아서였다. 



  쓰라린 허벅지를 매만졌다. 중학생 때부터의 습관은 한참 지난 지금까지도 고쳐지지 않았다. 지금도 회사에서 상사에게 혼나고 표정관리가 되지 않으면 저도 모르게 바지 위로 허벅지를 세게 꼬집곤 했다. 그 시절의 어린 카게야마도 마찬가지였다. 있는 대로 다 뱉어내고 표현했던 카게야마는, 오이카와에게 혼나지 않기 위해, 또 울지 않기 위해 제 혼자 감정을 삭일 방도를 찾은 것이었다.

  모두가 신나게 대화를 나누고 서로의 안부를 물으며 추억을 되새길 때, 카게야마는 테이블 아래에서 몇 번이고 또 제 피부를 비틀었다. 자꾸만 눈물이 날 것 같아서였다. 오이카와에게 어떻게든 잘 보이고 싶었고 눈에 들고 싶었던 중학교 1학년의 카게야마 토비오. 10년이 지나 어엿한 사회인이 된 그의 속은 여러 생각으로 이리저리 뒤틀리고 있었다. 눈부시게 빛났던 그 날의 햇빛과 그 아래 서서 얼굴을 보여주지 않았던 오이카와. 냉정했던 그의 목소리와 오래토록 잊지 못했던 손에 닿던 그 감촉. 그리고 그의 결혼식. 목 뒤로 넘어가는 것이 술인지 운동장 모래인지 모를 정도로 목구멍이 텁텁하니 쓰라렸다.


  "그때 마니또 기억나십니까, 이와이즈미 선배? 제가 선배 마니또였는데."

  "아, 그래. 그거 너무 티 나서 처음부터 알아차렸잖아. 진짜 웃겼다니까."

  "카게야마도 엄청 티 났었죠."


  맞아. 엄청 그랬지. 킨다이치의 입에서 나온 제 이름에 카게야마는 그릇에서 시선을 떼었다. 티 났나? 카게야마는 진심이었다. 그 말에 테이블에 둘러 앉아있던 사람들이 모두 큰 소리로 웃었다. 눈치 없는 건 지금까지도 여전하구나, 카게야마. 하긴 어릴 때도 눈치 너무 없어서 놀리는 맛에 살았지. 중학교 3학년 때도 저 녀석 눈치 없이 굴다가 저희랑 사이 나빠졌던 거였잖아요. 카게야마는 그 말에 살포시 웃어 보였다. 한때는 트라우마가 될 정도로 힘들었던 일이었는데, 이제는 그저 우스갯소리로 넘길 수 있다는 사실이 한 편으로는 신기했고 또 다른 한 편으로는 씁쓸했다.


  "아마 합숙 때 네가 오이카와 선배의 마니또였단 거 모르는 사람이 없었을걸."

  "진짜?"

  "아, 너무 웃기다. 아직도 몰랐어? 카게야마, 진짜 멍청해."


  

  카게야마는 오이카와의 마니또였다. 


  "모두들 낮에 나눠 준 종이에 마니또를 위해 편지를 쓰는 거다. 내일 아침까지 꼭 걷을 테니까 절대로 잃어버리지 말고 잘 갖고 있어야 돼. 잃어버린 사람은 운동장 열 바퀴. 걷은 편지는 내일 중으로 전달해줄 거니까… 일단 제때에 일어나고. 그럼, 이만 해산."

  "감사합니다!"


  카게야마는 가방 속에 잘 보관해놨던 종이를 꺼내 들었다. 모두 저녁을 먹고 쉬러 들어가거나 운동장에서 호스로 물을 뿌리면서 더위를 식히며 놀고 있었는데, 카게야마는 그들 사이에 끼지 않았다. 여전히 불이 켜져 있는 제1 체육관에 들어가 엎드려서, 몰래 편지를 쓰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아무에게도 보여주고 싶지 않은 내용을 담고 싶었다. 어떻게 본인 마니또가 절묘하게 오이카와가 되었는지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이왕 쓰게 되었으니 제대로 전하고 싶었다. 얼마나 자신이 오이카와를 좋아하고 또 존경하는지. 그리고 또 그를 바라보는 것이 얼마나 힘들면서도 또 고픈지.

  카게야마는 연필 두 자루와 지우개뿐인 필통 속에서 조금 더 뾰족하게 잘 깎인 연필을 꺼내 들었다. 그러고선 종이 왼쪽 귀퉁이에 사각사각 그의 이름을 새겨 넣었다. 오이카와 선배에게. 하지만 그도 잠시, 선배라고 쓰면 너무 후배라는 것이 티가 나겠다 싶어 지우개로 벅벅 지워냈다. 하지만 얼마나 꾹꾹 눌러썼던 건지 종이 위에 연필 자국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제 마음에도 그랬다. 아무리 허벅지를 꼬집어 그를 향한 사랑을 덜어내려 해도, 이 슬픔을 떨쳐내려 해도 좀처럼 가슴 속에 박힌 오이카와는 빠져나가지 않았다.


  "뭐하는 거야?"


  갑자기 머리 위로 울리는 목소리에 카게야마는 반사적으로 두 팔로 종이를 가렸다. 얼굴을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 목소리의 주인이 오이카와라는 것을. 카게야마는 필사적으로 그 연필 자국을 가리려 노력했다. 비록 하얀 종이 위엔 자국 외엔 아무것도 없었지만, 그를 생각하는 것만으로 이미 충분히 제 감정을 다 털어놓은 것 같았기에 들키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오이카와는 종이엔 별 관심이 없다는 듯 팔짱을 끼고 카게야마를 내려다보았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래? 그런데 여기 있으면 안 된다고 분명히 말했을 텐데. 연습은 8시 이후로 금지야."

  "……알고 있습니다."


  카게야마는 종이를 서툴게 접었다. 그러고선 가방에 구겨 넣듯 집어넣었다. 빳빳하고 깨끗한 종이 위에 마음을 적어 내려가고 싶었는데, 갑작스러운 오이카와의 등장으로 모든 것이 무산이 되어버렸다. 떨리는 손으로 거칠게 가방 지퍼를 닫고, 조심스레 벗어놨던 신발을 구겨 신고 카게야마는 자리를 벗어나기 위해 발걸음을 옮겼다. 너무나도 답답했다. 숨이 턱하고 막혔다. 오이카와를 너무나도 좋아하지만 단둘이 남겨지는 상황은 바라지 않았다. 카게야마는 서둘러 체육관을 벗어나 어디로든지 그를 피해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카게야마는 벗어날 수 없었다. 자꾸만 뒤에서 아무 말 없이 제 뒤를 따라오는 오이카와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정신없이 걷다가도 힐끗 뒤를 돌아보면 팔짱을 낀 채로 자신을 노려보듯 바라보는 오이카와가 그곳에 서 있었다. 체육관에서 모두가 있는 곳은 또 얼마나 먼 건지 아무리 걸어도 끝이 보이지 않았다. 무거운 가방을 들고, 빠른 걸음으로 걸으려니 숨이 차기 시작했다. 빨리 걸으며 불규칙한 숨을 내뱉다가 간혹 크게 들이쉬었을 때, 콧구멍에서부터 폐 저 깊숙한 곳까지 열대야의 기운이 가득 찼다. 25도는 족히 넘을 것 같은 무더운 여름밤의 공기가 카게야마는 버거웠다.


  "토비오 쨩."

  "......"

  "잠깐 멈춰봐."


  달빛만이 비추던 어두운 길 위에서, 오이카와는 카게야마의 이름을 불렀다. 친근한 듯 친근하지 않은 말투로 오이카와는 카게야마를 향해 다가왔다. 카게야마는 걸어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멈춰 섰다. 오이카와는 그가 들고 있던 가방을 빼앗아 들고서 카게야마의 손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는데도 무엇을 그렇게 보려는 건지, 맞잡은 손이 뜨거워 카게야마는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토비오 쨩. 낮에 다친 거 약 안 발랐지. 세터가 되려면 손이 중요하다고 했어, 안 했어. 늘 손이 가장 중요하다고 몇 번이나 말했는데 그렇게 말 안 들을 거야? 오이카와는 카게야마의 손목을 잡고 어디론가 향했다. 손목을 잡은 손이 억셌다. 그가 잡은 부위는 치명적일 정도로 뜨거웠고, 놀란 카게야마는 반사적으로 그의 손에서 벗어나려 힘을 썼다. 하지만 앞서 걸어가는 오이카와는 그가 벗어날 틈을 주지 않았다. 마치 맘 놓고 좋아할 기회를 주지 않았던 것처럼 오이카와는, 그날 밤에도 마찬가지로 카게야마의 폐부를 어지를 듯 굴었다.


  "앉아."


  두 사람은 운동장이 훤히 보이는 계단에 앉았다. 도통 오이카와의 행동의 의미를 이해할 수 없던 카게야마는 오이카와가 앉아서 손으로 옆자리를 툭툭 치는데도 쭈뼛쭈뼛 서 있기만 했다. 안 앉고 뭐 해. 오이카와는 카게야마의 손목을 잡아당겨 옆에 앉도록 했다. 조심성 없기는. 오이카와는 저지 주머니에서 연고와 반창고를 꺼냈다. 그리고 더웠던 건지 져지를 벗어 바닥에다 내려다 놓았다.


  "토비오 쨩은 말이지, 가끔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통 모르겠어."

  "……아무 생각도 아닙니다."


  그 말을 끝으로 두 사람 사이엔 한동안 아무 대화도 없었다. 오이카와는 카게야마의 손가락과 손바닥에 까진 부분을 정성스레 소독하고, 연고를 발라주었다. 토비오, 예전부터 계속 그러더라. 상처가 생기면 왜 자꾸 건드는 거야? 만지면 자꾸 덧나서 또 진물이 나잖아. 카게야마는 대꾸할 방법을 몰랐다. 신경이 오로지 닿은 부위에 집중되어 있어 마치 말하는 법을 잊은 듯, 연달아 다가오는 어두운 정적 속에 입을 묻었다.

  무릎의 상처에도 반창고를 발라주고 나서야 오이카와는 일어섰다. 카게야마는 여전히 계단에 앉아 서 있는 그를 바라보았다. 고요한 밤하늘 아래로 별빛이 가득했고, 은은한 빛은 오이카와를 비췄다. 그 아래서 오이카와는 아무 말도 않고 서서 두 사람 사이에 부대끼는 습도 높은 여름 바람을 온몸으로 맞았다. 카게야마는 습관처럼 허벅지를 꼬집었다. 눈물이 날 것 같아서였다. 너무 어두워서 그의 얼굴을 제대로 보지 못했고, 주변에 가득한 풀냄새와 땀냄새에 그의 향기를 제대로 맡을 순 없었다. 그리고 밤바람에 나뭇잎 스치는 소리와 벌레 우는 소리에 그의 목소리를 온전히 귀에 담지 못했지만,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그가 옆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늘 퉁명스럽게 대하던 그가 이렇게까지 본인에게 잘 대해주는 이유는 몰랐으나, 그저 자신의 손을 잡고 걱정해주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카게야마는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여름 밤하늘 아래서 홀로 빛나는 오이카와를 바라보며, 카게야마는 두 눈으로 쏟아지는 별을 삼키며 깜빡였다. 그러고서 마치 별이 눈에 들어간 것처럼 따가워서 눈물을 흘렸다.


  "또 왜 우는 거야?"

  "......"

 

  하여간. 계속 울면 그 눈물샘, 이 오이카와 씨가 콱 막아버릴 거니까 그만 좀 울어. 울보야.

  그러고서 오이카와는 져지를 주워들고 홀로 밤길을 걸었다. 카게야마는 그 모습을 보면서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열대야로 오래토록 몸에 남은 열 때문에 몸이 축 늘어지듯 힘이 다 빠져서 쉽게 일어설 수가 없었다.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오이카와를 한참이나 바라보다 두 손으로 제 뺨에 손을 올려보았다. 조금 전까지 그의 손이 닿았을, 반창고가 감긴 손 가득 열기가 느껴졌다. 뜨거웠다. 분명 더워서 그런 것일 터였다. 열대야니까.

  숨이 턱하고 막혔다. 여름 탓인지, 그의 생각 탓인지 모를 일이었다. 울고 싶었다. 하지만 카게야마는 또 울 수는 없었다.

  왜냐하면, 울지 못하도록 오이카와가 눈물샘을 꽉 막고 있었기 때문에.




* * *




  술에 취해 해롱거리는 쿠니미를 앞에 두고, 카게야마는 턱을 괴고 옛일을 회상하고 있었다. 추상에서 벗어나 현실로 돌아왔을 때, 그는 이미 한참이나 그때에서 멀리 걸어 나와 버린 성인이 되어있었다. 좋아하는 사람을 좇아 배구를 하던 시절은 이미 종말을 고했다. 먼 미래일 것이라 생각했던 때가 현실이 되어 다가와 있었다. 과거에, 어린 마음에 오이카와 선배는 누구와 결혼을 하게 될까 생각했던 것이 당장 오늘날의 이야기가 되어버렸다.

  그 사람과 결혼하게 될 여자는 어떤 여자일까 괴로운 생각을 하다, 거의 다 비어버린 피처 잔을 들어 제 잔에 부으려 했지만, 돌연히 내일 아침 일찍 출장을 가야 한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카게야마는 더 이상의 추억에 잠기는 일에 시간을 쓰고 싶지 않았다. 괴로웠기 때문에. 술을 아무리 들이마셔도 몸속에는 여전히 오이카와에 대한 생각만이 가득했기 때문에.


  "그런데 그때 마니또 한다고 편지 썼던 거 결국은 못 찾았습니까?"

  "아, 그거. 오이카와 녀석이 잃어버리고선 한참 뒤에 발견해서 그냥 그 녀석이 들고 갔었어."

  "에, 저도 나름으로 열심히 썼었는데. 그만 좀 혼내라고."

  "이 녀석이."


  카게야마는 술로 달아오른 뺨을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그러고 보니 그 편지 못 받았구나. 누가 내 마니또일까 궁금했는데. 정확히 자신이 뭐라고 오이카와를 위해 써서 냈는지도 가물가물했다. 밤새도록 열대야에 뒤척이다 다음 날 아침에 제출하라 할 때 부랴부랴 겨우 몇 자 써서 냈던 기억만이 남아 있었다. 아, 그런데 오이카와 녀석이 최근에 청첩장 보내면서 몇 장 줬었거든. 애들한테 보내달라고. 그때 종이 잃어버린 거 미안하다고 내가 나중에 모임 열 때 편지 보내겠다고 했던 거 그 녀석도 용케 기억했나 보더라. 아마 카게야마 너한테도 보냈을 거야.


  "저한테요?'

  "어. 집 가서 봉투 꼭 열어 봐야겠네, 너. 별말 쓰진 않았지만 내 편지랑 오이카와 청첩장이랑, 그때 마니또 편지랑…… 또 합숙날 찍었던 사진 같은 거 보냈으니까."



  오이카와는 제 잘못으로 편지를 잃어버렸다고 사과했었다. 카게야마는 오히려 그런 편이 훨씬 더 낫다고 생각했다. 생각했던 소중한 문장들을 모두 써내려가지도 못했고, 오로지 단 한 문장만 적어넣었지만, 그 문장마저 부끄러운 말이라 오히려 오이카와가 읽지 못하게 되는 편이 더 나았다. 귀퉁이에 꾹꾹 눌러 적었던 이름도 마저 지우지 못했고. 그냥 그 종이는 여름 바람을 타고 어디론가 멀리 날아갔으면 했다.

  합숙 마지막 날, 이와이즈미는 지난 5일간 모두 수고했다며 단체 사진을 찍자 권했다. 여름 합숙 내내 카메라를 들고 다니며 사진을 찍던 매니저가 삼각대 위에 카메라를 올려놓았다. 각자 어떤 포즈를 지을까 어수선한 틈을 타 카게야마는 눈으로 오이카와를 찾아 헤맸다. 1학년이라 아직 키가 작아, 키가 큰 선배들 사이에서 오이카와를 찾기는 쉽지 않았다. 그러다가 2학년 선배가 제대로 서라며 카게야마의 얼굴을 정면으로 향해 돌렸고, 카게야마는 입이 툭 튀어나온 요상한 표정으로 단체 사진 속에 담겼다.


  "사진은 나중에 보내줄게."


  그게 언제가 될진 모르겠지만! 어디선가 나타난 오이카와가 이와이즈미를 향해 외쳤다. 부장이면 부장답게 행동하라며 이와이즈미는 오이카와의 멱살을 잡았고, 오이카와는 입으로는 미안하다고 얘기하며 헤실헤실 가볍게 웃어 보였다. 그의 말 하나에 어수선하던 분위기가 정리되었고, 화기애애해졌다.


  "이번 합숙은 최고였어. 그리고 다들 열심히 했어. 분명 짧은 5일이었지만 각자 그리고 모두에게 많은 발전이 있었을 거야. 그리고 내가 잃어버린 편지는 10년 뒤에 이와 쨩이 대신 써줄 거야."

  "뭐라는 거야!"


  그 말을 끝으로 중학교 1학년, 배구부로서의 첫 합숙 기간이 끝이 났다. 카게야마는 저지를 가방에 걸쳐놓고 오른쪽 어깨로 가방을 들었다. 가방 속엔 땀으로 젖은 티셔츠와 바지, 배구화, 물이 반쯤 차있을 물통, 그리고 추억이 가득해 무거웠다. 그리고 오이카와를 향한 제 짝사랑도 그곳에 존재했다. 미야기의 눅눅한 여름 바람을 머금은 채. 카게야마는 얼른 따라오라는 쿠니미의 재촉에 발걸음을 옮기며, 반대쪽으로 걸어가는 오이카와의 뒷모습을 찾아 헤매었다. 아, 오이카와 씨.

  무엇을 보고 있는 건진 알 수 없지만, 환하고 다정하게 웃는 그의 얼굴이 일몰에 환히 타들어 가고 있었다. 그의 빛나는 모습은 붉음과 푸름이 적절히 공존해서, 너무나도 아름다운 여름의 노을과도 같았다.

  눈이 부셨다.

  그래서 눈물이 날 것 같았다.




* * *


  


  "저 이만 가보겠습니다. 내일 아침에 바로 출국해야 돼서…"

  "가게? 아쉽네. 모처럼 만났는데."

  "카게야마 군, 가는 거야? 아쉽다!"


  카게야마가 풀어놨던 셔츠 소매의 단추를 여미며 자리에서 일어서자 모두 아쉽다며 작별 인사를 건네었다. 연락이 오랫동안 되지 않아도 잘 살고 있어 다행이라며, 다음번에는 꼭 다같이 미야기에서 만나자며 모두들 얘기했다. 미야기에서 만나자, 라. 오이카와의 결혼식일 게 분명했다.


  "오이카와 녀석도 많이 보고 싶어 하니까. 결혼식에 꼭 올 수 있음 오고."

  "네."

  "그리고 내가 보냈던 봉투에 청첩장이랑 사진 같은 거 많이 들어있으니까 꼭 다 봐."


  처음에 이 방에 발을 내디뎠을 때 손을 건네었던 것처럼, 이와이즈미는 카게야마에게 또다시 악수를 위해 손을 내밀었다. 카게야마는 잠시 주춤하다 손을 내밀어 그와의 안녕의 악수를 마무리 지었다. 아쉬움이 섞인 인사를 건네는 모두를 뒤로하고 카게야마는 방에서 빠져나왔다. 


  계단을 내려가면서 카게야마는 서둘러 가방을 뒤적였다. 자칫 잘못하다가 헛디디면 넘어질 수 있는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가방 안에서 이와이즈미가 보냈을 편지를 찾아 헤매었다. 내려가는 계단이 어두워 잘 보이지 않았지만 카게야마는 그날 밤 어둠 속에서 오이카와의 얼굴을 읽어내려 애썼던 것처럼 오로지 손끝에만 의지해 하얀 편지 봉투를 찾았다.

  마침내 제 손안에 그 편지를 쥐었을 때 카게야마는, 다시 밀려들어 오는 한여름의 느낌에 질식할 것만 같았다. 가게를 벗어나자 다시 무더운 열대야의 기운에 휘말려야 했기 때문이라 생각했다. 얼마 걷지도 않았는데 금세 땀이 비집고 흘렀고, 얼굴은 달아올라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카게야마는 조심히 봉투 끝을 봉하고 있는 테이프를 손톱으로 긁어 뜯었다. 혹시나 잘못 열었다가 안에 있는 내용물에 손상이라도 입히면 어떡하나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 날, 오이카와의 손에 이끌려 가로수 아래를 허둥지둥 걸었던 것처럼, 카게야마는 불규칙적인 발걸음으로 밤길을 걸었다. 새벽 한 시의 고요한 골목길이 어두워 그는 가로등을 찾았다. 10년 전에 미야기의 하늘을 가득 수놓았던 별은 도쿄에선 보이지 않았다. 인위적으로 밝힌 빛 아래에서 카게야마는 편지 봉투 속 내용물을 꺼내보았다.


  신랑 오이카와 토오루.

  결혼식은 당연히 미야기에서 치러질 예정이었다. 하지만 카게야마는 가고 싶지 않았다. 그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단 한 번도 본인을 찾지 않았던 것처럼, 카게야마도 모두를 찾지 않았다. 그렇게 옛 감정은 예전의 것으로 묻어둔 채 앞으로 나아가고 싶었던 것이었다. 만약 오이카와를 오늘 만났더라면 또다시 첫사랑의 기억에 얽매여 버렸을 터였지만, 그를 만나지 못한 이상 모든 것을 과거의 것으로 흘려보낸 채 줄곧 걸어나가고 싶었다.

  이와이즈미의 안부가 담긴 편지를 다 읽고서 카게야마는 봉투 가득 들은 사진을 꺼내 한 장씩 넘겨 보았다. 10년이 지난 사진이었지만 색은 바래지 않았다. 첫 번째 사진은 쿠니미와 킨다이치 사이에서 물을 맞으며 웃고 있는 제 모습이었다. 2학년 선배들에게 먼저 물을 뿌렸기에 복수 차원에서 맞아준 물이었다. 저 때만 해도 사이가 좋았었지, 라며 카게야마는 씁쓸하게 미소지었다. 다음 장으로 넘겨보니 제 몸에 조금 컸던 저지를 몇 번이나 걷어 입고서 모호한 표정으로 브이 자를 그리던 제 모습이 보였다. 저 져지 아직 본가에 있는데. 새록새록 떠오르는, 처음으로 저지를 받던 그 날이 또 떠올랐다. 그 이후로도 선배들 사이에서 밥을 먹는 삼총사, 캠프파이어 앞에서 겁에 질려 울던 어린 시절의 자신, 배구공을 들고서 배시시 웃고 있는 옛 모습이 보였다. 그러다 사진을 넘기던 카게야마의 손가락이 잠시 멈칫했다.

  사진 속에는 넘어져서 울며 달리던 제 모습이 찍혀 있었다. 매니저가 왜 우냐며 비웃으며 사진 셔터를 찍어대기에 화를 냈던 것이 기억이 났다. 그때, 오이카와 씨 나를 걱정해주지 않았지. 뒤늦게야 찾아오셨었고. 인상 찌푸린 제 얼굴을 보다가 문득 카게야마는 배경에 저 멀리 서 있는 오이카와를 발견했다. 여름 냄새가 물씬 났다. 그곳엔 환하게 웃는 오이카와가 있었다. 그렇게도 보고 싶었던 그의 다정한 얼굴이었다. 뒤에서 자신을 바라보며 이 세상 누구에게 보여줬던 것보다 따뜻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카게야마는 그 얼굴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눈물을 참기 위해 허벅지를 꼬집으며 한참이나 사진을 바라보다 마지막으로 남은 사진을 꺼냈다. 단체 사진이었다. 키가 큰 선배들 사이에서 입을 쭉 내밀고 엉뚱한 표정을 지은 어린 카게야마의 모습이 보였다. 그러다가 문득 든 오이카와의 생각에, 카게야마는 오이카와를 찾았다.


   "아."


  그는 생각보다 가까운 곳에 있었다. 자신이 볼 수 없던 곳에 서 있어 찾지 못했던 것이었다. 팔짱을 끼고 비스듬히 서 있는 그의 얼굴 위엔 미소가 번져져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또 눈물이 날 것 같아 카게야마는 바닥에 주저앉았다. 하지만 한 가지 놀라운 사실은, 오이카와는 정면을 바라보고 있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자세처럼 살짝 비스듬히 고개를 돌린 채 무언가를 바라보고 웃고 있었다. 환한 미소로. 카게야마는 찡해져 오는 코를 제어하기 위해 인상을 팍 쓴 채로, 그의 시선의 끝을 따라갔다.


  "……."


  그 끝엔 본인이 서 있었다. 오이카와를 그토록 찾아 헤매던 카게야마가. 손이 떨려 사진을 바닥에 떨군 카게야마는 고개를 푹 숙이고 또 습관처럼 허벅지를 꼬집다가 어렴풋이 저 기억 너머에서 떠오르는 자신이 적은 마니또 편지 위에 써내려간, 낡은 말을 떠올렸다. 좋아해요. 단 한 마디였다. 구겨진 종이 위엔 오이카와의 이름을 썼다 지운 자국과 "좋아해요."라는 그 서툰 문장만이 존재했다.


  오이카와를 좋아했던 어린 감정은 쉬이 넘겨버릴 수 있는 옛 감정 따위가 아니었다. 과거의 차원을 넘어서 현재까지도 이어져 영향을 주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인 감정이었다. 오래토록 그를 보지 못했고, 보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또 노력했지만, 잊히질 않았다. 고등학교를 졸업하는 그의 뒷모습을 고등학교 시절 내내 잊지 못했고, 대학에 들어가서 여자 학우들의 고백을 받아들이지도 못했고, 그가 있을 거라 생각해 무리하게 모임에 참석했던 그 모든 이유가, 아직도 그를 좋아하고 있었기에 그랬다는 것을 카게야마는 비로소 깨달았다. 한참이 지난 어느 여름날에.

  그의 결혼 소식을 듣고 가슴이 철렁했던 것도, 그가 보고 싶어 모임에 참석한 것도 모두 이 감정이 여전해서 그런 건데 어떻게 그저 오래된 과거의 것으로 치부해버릴 수가 있었을까. 카게야마는 허벅지를 오래토록 꼬집다가 고개를 들었다.


  카게야마는 얼굴에 열이 달아오르는 것을 느껴 땀에 젖은 두 손을 양 볼에 얹었다. 뜨거웠다. 그때처럼 뜨거워서 손이 델 듯 했다. 하지만 지금의 카게야마는 알았다. 단지 한여름의 열대야로 더운 것이 아니라는 것을.

  그가 보고 싶었다.

  카게야마는 그가 단 한 번도 본인을 향해 제대로 보여주지 않았던 그 다정한 얼굴을 찾기 위해 바닥에 엎질러진 추억 더미에서 사진들을 찾았다. 그러다가 자신이 보지 못한 흰 종이 하나를 발견했다. 그 종이의 왼쪽 귀퉁이엔 이렇게 쓰여 있었다.


  "토비오."


  토비오. 본인을 토비오라 불렀던 건 오로지 오이카와 뿐이었기에 카게야마는 그의 목소리를 떠올리자 코끝이 찡해 살짝 인상을 썼다. 그러고선 왼손으로는 허벅지를 세게 꼬집으며 흰 종이 위에 쓰인 나머지 글자를 읽어내려갔다.


  "나도."


  가로등 불빛 아래서 흩날리는 먼지를 타던 '그 목소리'는, 곧 열대야의 열기에 야속하게도 증발해버리고 말았다. 숨이 턱하고 막혔다. 열대야의 공기 탓인지, 그에 대한 생각 탓인지 여전히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카게야마는 울 수 없었다. 왜냐하면, 여전히 울지 못하도록 그가 눈물샘을 막고 있었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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