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카카게] 주어진 운명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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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을 열기도 전에 아카아시는 잠시 망설였다. 학교에서 수업을 들으면서도 머릿속에서 수십 번도 더 미리 그리고 또 그려본 상황이었지만 막상 눈앞에 닥친 일이라 생각하니 괜스레 도어락에 손을 대기가 힘들었다. 카게야마가 도쿄로 대학을 오고, 같이 살게 된 이후로 몇 번씩이나 히트싸이클로 고통스러워 하는 모습을 옆에서 지켜봤어도, 베타인 아카아시에게 알파와 오메가만의 세계는 여전히 미지 그 자체였다.


   “카게야마.”


  아카아시는 조심히 집안에 들어섰다. 그리고 고통의 신음이 가득한 거실의 공기에 카게야마의 이름을 내뱉어보았다. 카게야마는 거실의 소파 위에 거의 떨어질 듯 위태롭게 드러누워 제 몸을 끌어안고 신음을 흘리고 있었다. 얼마나 오랫동안 버티고 있었던 건지, 멀리서 봐도 온몸에 땀이 가득한 걸 한눈에 알 수 있을 정도였다. 아카아시가 학교에서 돌아와 제 모습을 바라보며 이름을 부르고 있는지도 전혀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로. 아카아시는 가방을 조심스레 바닥에 내려놓고, 카게야마의 신음을 이겨내며 침착하게 부엌으로 향해 투명한 유리잔에다 물을 받았다.


  "약 먹자."


 카게야마는 혼자 있으면 약도 제대로 챙겨 먹지 못할 정도였기에 아카아시는 매 아침마다 걱정이었다. 오늘도 역시나 마찬가지였다. 부엌까지 걸어가지 못할 정도로 카게야마는 충분히 힘겨워 하고 있었다. 이마에는 땀이 송골송골 맺혀있었고, 격한 숨을 내쉬느라 말라버린 입술은 갈라져 피가 흘렀다. 아카아시는 입가에 맴도는 피를 조심히 닦아준 뒤 카게야마의 두 입술 사이로 약과 물을 넣어주었다. 받아먹기 전 고맙다는 그의 짧은 대사는 평소와 다를 바 없었지만, 때가 때인지라 그 목소리엔 신음과 숨을 억지로 참는 의지가 가득했다. 아카아시는 두 주먹을 세게 쥐었다.

  알약을 제대로 넘기지 못하는 카게야마를 도와 뒷목을 받쳐주었고, 카게야마는 몇 차례 기침을 토하다가 아카아시의 도움으로 겨우 힘겹게 입안에 든 것들을 삼켜내었다. 작은 목구멍으로 어떻게 그 큰 캡슐을 넘길 수 있는 건지. 하루에 한 번씩 이런 걸 먹어줘야 하는 카게야마를 걱정하며, 아카아시는 눈물 가득한 얼굴로 자신을 올려다보는 그의 볼을 쓰다듬어 주었다. 괜찮아, 카게야마. 잘했어. 이번에도 이렇게 넘기면 돼. 제 볼을 쓰다듬는 아카아시의 손 위로 카게야마는 제 뜨거운 손을 얹어보았다. 땀에 젖은 손바닥은 축축하고 습했다.


  약을 먹고도 한참 동안 들뜬 숨을 내뱉던 카게야마는 그림자가 조금 기울어져서야 약발이 들었는지 편하게 잠이 들었고, 아카아시는 곤히 잠든 카게야마의 볼을 계속해서 쓰다듬으며 살갗을 타고 흐르는 땀을 닦아주었다. 알파와 오메가로 태어난다는 건 어떤 운명이고, 또 베타로 태어나 그들의 세상을 잘 알지 못한다는 건 또 어떤 운명일까. 아카아시는 제게 주어진 삶을 생각해보았다. 성적 욕구에 휘둘릴 필요도 쫓길 필요도 없는, 그냥 사랑하는 사람과 평범히 사랑하고 또 만날 수 있는 자신의 삶을. 제 무릎을 베고 잠이 든 카게야마 토비오라는, 본인의 사촌 동생은 그런 삶을 살 수 없다는 사실이, 아카아시는 옆에서 지켜보면서도 믿기지 않았다.


  "그래도..."


  아카아시는 카게야마가 깊은 잠에 빠진 것을 확인하고서 머리 아래에 조심히 베개를 받쳐주었다. 그러고서 본인은 바닥에 앉아, 본인이 처한 운명의 티끌조차도 하나도 모른다는 표정으로, 편안히 꿈속을 헤매는 카게야마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다른 곳에서 태어나, 다른 삶을 살던 두 사람. 이제야 비로소 같은 공간에서 같은 시간을 공유할 수 있게 되었는데, 두 사람의 운명은 너무나도 달랐다.


  "나는 늘 내가 알파였으면 하고 생각해."


  카게야마.






[오이카게] 모든 것이 그때와 달랐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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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득 길을 걷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우리의 모든 것이 그때와 달랐다면 어땠을까. 네가 내 선배고, 내가 네 후배였다면. 우리 두 사람이 같은 세터가 아니라 다른 포지션이었다면. 좀 더 멀리 가, 우리 둘 다 배구를 좋아하지 않아서, 같은 배구부의 선후배 사이가 아니라 그저 평범하게 길 가다 마주하는 사이였다면. 혹은 그저 옆집 사이였다면. 아니면 네가 여자라, 남자인 내가 널 오래도록 짝사랑하다 무사히 결실을 거둘 수 있었다면. 그런, 아주 부질없는 생각이 들었다.

  밤길 위에 서성이는 밤바람은 전혀 모질지 못했다. 뺨을 살짝 스치는 정도로, 긴 시간 동안 눈물로 흠뻑 젖어있는 가슴을 눅눅하지 않을 정도로만 말리는 솔바람이었다. 나는 그 길 위에 서서 조용히 눈을 감고 또 다시 골몰했다.

  나도 너를, 너도 나를 사랑하지 않았더라면.

  우리의 모든 것이 그때와 달랐다면 어땠을까.


  따스한 봄날 벚꽃이 피면 너는 그 아래서 행복하게 웃었고, 비 내리는 여름날 예고 없이 찾아온 소나기에 정처 없이 헤매다가 수국을 만나면 네 미소는 푸르게 물들었다. 가을날엔 내가 걸쳐준 져지를 여미다 하굣길에 가득한 코스모스밭에 너는 뛰어들었고, 겨울이 오면 눈이 쌓여 가려진 동백꽃을 함박눈 사이서 찾아내며 추운 겨울을 보냈다. 그러면 나는 언제나 멀찍이 뒤에 서서 만개한 너의 모습을 눈에 담는 게 나의 일이었다.

  꽃이 피면 꼭 언젠가는 지게 되어있었다. 아주 당연한 얘기였다. 언젠가 우리 머리 위 하늘을 수놓았던 벚꽃잎도 눈 깜짝할 새에 바닥으로 가라앉고, 잔뜩 빗물을 머금은 채 네 얼굴을 환하게 비췄던 수국도 장마가 지나면 안녕을 고했다. 우리의 추억을 잔뜩 담은 코스모스 꽃잎은 시간이 지나면 거름이 되어 형태 모르게 사라지고, 따뜻한 봄이 찾아오면 나뭇가지는 추위와 함께 꽃을 떨쳐낸다.

  우리의 사랑도 그랬다. 인연이 한 번 시작되면, 출발의 순간에서부터 종말은 평행선을 따라 쫓아오는 법이었다. 나와 너의 마지막은 어떨 것 같냐는 질문에 "끝을 미리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까, 오이카와 씨?"라며 너는 내게 물었다. 머리에 꽃을 꽂고, 입에 만두를 물고서 내게 또 다시 질문했다. "그렇다면 오이카와 씨가 이렇게 말씀하시는 건 저와의 마지막을 준비하시려는 건가요?" 물론 나는 그때 뿐만이 아니라 언제든지 마지막을 맞을 준비가 되어있었다.

  그 날처럼 아주 갑작스럽게 찾아온 너의 마지막을.

  

  너를 떠나보내고 나는 겉으로 울지 않았다. 봄이 오면 벚꽃을 보고, 여름이 오면 수국을 맞이하고, 가을이 오면 코스모스를 만져보고, 겨울이 오면 동백꽃을 따다 방에다 두었다. 그리고 네 이름을 불렀다. 그리고 속으로 울었다. 꽃이 된 네가 내 울음소리를 듣지 못하게, 꽃잎 가득 내 눈물을 머금지 못하게.

  언제든지 우리의 마지막을 준비하고 있었던 나는, 절명 직전까지 내 이름을 부르던 너를 잊지 못했다. 비록 너는 네 인생의 종말을 넘어 어디론가 향했지만, 나는 그 끝의 순간에서 위태롭게 매달려 너를 부르고 있었다. 결국, 마지막을 대비하고 있던 건 나였지만 그걸 받아들이지 못한 건 오로지 나뿐이었다. 너는 그렇게 철 지난 꽃처럼 시들어 끝을 맞이하고, 나는 오로지 그걸 바라볼 수밖에 없었던 역할이었으므로......

  

  우리의 모든 것이 그때와 달랐다면 어땠을까.

  시작이 달랐다면, 이렇게 슬퍼하지 않아도 되었을까. 너의 죽음으로 끝을 맞이하지 않아도 되지 않았을까. 너는 지지 않아도 괜찮았을까. 네가 선배고, 내가 후배고. 내가 오이카와 토오루가 아니고, 네가 카게야마 토비오가 아닌 다른 사람이었다면. 다른 사람으로 서로를 만난 것이었다면 우리는 이렇게 비참한 결말을 맞이하지 않아도 되지 않았을까.


  너의 마지막 순간을, 가시 끌어안듯 아주 조심히, 가슴이 찔려 다치지 않게 끌어 안으며 나는...... 또다시 밤길을 걸었다. 눈물과 더불어 가슴을 적시는 피와, 심장이 터지지 않게끔만 관통해오는 수많은 가시를 가슴에 품고서.

  모든 것이 그때와 달랐다면 어땠을까. 라는 부질없는 생각을 하고서.






[쿠니카게] 환지통幻肢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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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등학교 4학년 때 일이었다.

  여름방학 숙제로 저금통을 만들기 위해 커터칼로 상자를 자르다가 손가락 깊이 칼심을 박아넣었던 적이 있었다. 올바르게 귀퉁이를 향해 틈을 만들어가던 쇠붙이가 저도 모르게 세게 힘을 주어 경로를 틀어버린 것이었다. 너무나도 갑작스레 일어난 일이라, 억 하는 소리도 내지 못한 채 나는, 멀뚱히 칼이 박힌 손가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왼손의 검지 뿌리 부분에 박힌 칼심을 생살은 굳게 앙다물고 있었고, 피는 흐르지 않았다. 한참 동안 멍하니 사태를 파악하는 것에 온 힘을 쓰다 뒤늦게 칼을 뽑아낸 나는 넘쳐 흐르는 피에 또다시 멈칫했다.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무릎을 적셔왔기에.

  나는 벌어진 살을 틀어막으며 태연하게 피를 닦아내었다. 그러고선 아무렇지도 않게 상처를 치료하고 반창고를 붙였다. 반창고로 둘둘 감은 손가락은 당장 아프지는 않았다. 손가락 보다, 미처 생각할 겨를도 없이 훅 다가온 순간에 대한 충격으로, 가슴이 더 답답할 뿐이었다. 그 아픔도 잠시 얼마 가지 않아 그 위로 딱지가 앉았고, 딱지마저 사라졌을 때 그곳엔, 잔상殘像만이 남아있었다.


  그런데 어쩌다 한 번씩 손가락이 아파왔다. 좋아하던 여자아이로부터 거절당했을 때, 비오는 창가 옆에 무릎을 끌어안고 앉아 돌아가신 할머니가 좋아하던 노래를 흥얼거릴 때, 영화관에서 슬픈 영화를 보고 나오며 코를 훌쩍일 때, 그럴 때마다 이따금 검지가 아파왔다. 상처의 정확한 부분부터 그 주변까지, 그리고 손가락 전체가 울리듯이 따가웠다. 그래서 언제부턴가 손가락을 잡고 사는 일이 습관이 되어버렸다. 따스한 오른손으로 그 부위를 잘 어루어 만져주거나 감싸고 있으면 조금이라도 통증이 덜했기에. 그 애도 내가 그런 것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카게야마는 아픈 손가락이었다. 검지였다.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아프고,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쓰라렸다. 길을 걷다가도 카게야마의 생각 하나로 나는 주저앉을 수 있을 만큼, 그 애는 나에게 그런 존재였다. 잘라내지 않는 이상 언제나 내 신체의 일부인 왼손의 검지처럼, 떼려야 떼어놓을 수 없는 그는, 나에게 항상 그런 존재였다.

  코치에게 호되게 혼나고 난 뒤 엉엉 우는 그 애의 옆에서, 머리를 쓰다듬어 주는 것만으로도 손가락이 아팠던 나는, 그를 사랑했다. 나는 성급하게 사랑에 빠져버렸고, 서툴게 그 사랑을 다루느라 언제나 힘들었다. 바람 부는 날 창가 자리에 앉아 멍하니 수업을 듣는 그 애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것도, 날리는 머리칼을 보며 샴푸 향을 맡으며 눈을 감는 것도, 가끔가다 스치는 손가락이 뜨거워 움츠리는 것도, 모두 그 애를 사랑해서였다.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그 사랑은 가슴에 쉽사리 번져왔기에 나는 늘 아픈 손가락을 달고 살아야 했다. 수업 시간 내내 아픈 손가락을 꼬옥 잡고 앞자리의 카게야마를 바라보다 종종 창문 너머 하늘을 바라보던 나는, 창틀 너머로 손을 뻗어보곤 했다. 그렇게 손가락 사이사이로 스며들어오는 바람을 느끼며, 나는 통증을 떠나보내고 싶었다. 그 애를 짝사랑하지 않는다면, 좋아하지 않는다면 이렇게도 아프지 않게 될까.


  중학교 2학년 때 일이었다. 하굣길에 나를 향해 손을 흔드는 카게야마를 향해 입으론 내일 보자고 얘기하며 마음으론 영원히 안녕을 고했다. 너를 앞으로 좋아하지 않을 거야, 손가락이 너무 아파서 너를 사랑할 수 없어. 라고. 그리고 나는 집으로 가는 길에도 끊어질 듯 아파지는 환부에 눈물을 흘렸다. 밤새 내내, 고통에 밤을 지새우며. 통절慟絕할 수만 있다면 당장이라도 그럴 것처럼 나는 검지를 붙잡고 울었다.

  너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마음먹는다고 해서, 너를 사랑하지 않을 순 없었다. 너를 사랑해서 손가락이 아픈 것이었다면, 너를 사랑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면서도 손가락이 아팠다. 나는 어디론가 잘못 달려가고 있었다. 마치 초등학교 4학년 여름방학 때, 가던 길을 벗어나 내 손가락으로 잘못 돌진해왔던 그 칼날처럼 나는 나도 모르는 곳을 향해 뜀박질 치고 있었다. 탈선하고 있었다. 이 끝에 무엇이 있는지도 모른 채 카게야마를 사랑하게 된 것처럼, 잘못 든 길의 끝에 무엇이 있는지 알지도 못한 채로.


  그 이후로도 그 애를 볼 때마다 손가락은 아팠다. 나는 그럴 때마다 절단의 욕망에 사로잡혔다. 손가락을 절단해내고 그 자리가 아물면, 안 아플 것 같다는 착각에 빠진 것이었다. 오래된 환부 주위로 번져오는 고통과 때를 놓쳐버린 사랑 모두에 질려버린 나는 집 창고에 있던 톱을 집어 들었다가 이내 바닥에 놓아버렸다. 나는 곧 깨달은 것이었다. 이 손가락이 없어도 난 늘 아플지도 모르겠다고. 치명적인 환지幻肢에 나는 영원히 고통받을 것이라고.


  나는 그 애가 내게 없어도 늘 아팠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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