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른쪽 클릭하고 연속재생


 


  소년에겐 가끔 모든 순간이 슬로모션처럼 보일 때가 있었다. 어디론가 급하게 움직이던 친구의 발걸음이 오래되어 늘어진 테이프처럼 본래 제 속도를 잃고, 학생들을 태우고 떠나가던 버스가 때가 지나도 시야에서 사라지지 않는다던가. 소년, 쿠니미 아키라는 종종 그런 순간 속에 덩그러니 놓이곤 했다. 그날도 마찬가지였다. 점심시간부터 쉴 새 없이 쏟아지던 비는, 부활동이 끝나고 하교할 때도 멈추지 않았다. 소년은 고개를 들었다. 습기에 눅눅해진 얼굴 위로 제법 긴 앞머리가 달라붙는 것이 느껴졌다. 하지만 치켜든 고개는 떨굴 줄을 몰랐다. 대신해서 바닥으로 빠르게 곤두박질치던 빗방울이, 눈을 몇 번 깜빡이자 어느 순간 흐르던 템포를 늦추고 온전한 제 모습을 드러냈다. 하지만 소년은 무심했다.

  학교를 자욱이 감싸고 있는 안개 속에서 살짝 때 놓친 한기를 느꼈던 소년은, 물기에 조금 누긋해진 져지를 가방에서 꺼냈다. 등 뒤엔 아오바죠사이라는 학교명이 큼지막하게 새겨져있었다. 소년은 이곳에 없는 옛 친구의 얼굴을 떠올렸다. 이젠 친구라고 하기엔 애매한 사이였지만, 언젠가 서로를 친구로 여겼던 순간이 한 번쯤은 있었던지라 쿠니미는 그를 그렇게 정의하기로 했다. 어쨌든 그 애는 절대로 아오바죠사이의 져지를 입지 않을 거라 말했다. 그건 진심이었다. 그에 대한 생각에 소년은 그제야 고개를 떨궜다. 제각기 다른 사연을 담고 다른 이름을 갖고 있을 무수한 빗방울들이 시야에 보이지 않게 되자, 빗소리가 뒤늦게 귓구멍에 차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하나를 잃어야지만, 하나를 얻는 건가……. 차마 자신과 그 친구 같지 않다고는 말할 수 없었다.



  소년은 조금 전에 닫은 가방 지퍼를 다시 열었다. 그러고선 눅눅해진 교과서 사이에서 우산을 찾았다. 하지만 보이지 않았다. 절로 얼굴이 구겨졌다. 우산을 잊어버렸던 건가. 소년은 언제 비가 그칠지 모르니 무작정 기다리기 보다는 그냥 빗속으로 뛰어들어가야 할지, 아니면 다른 친구에게 전화해 다시 학교로 돌아와 달라고 해야 할지 고민했다. 하지만 어느 쪽도 썩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랬던 적이 처음이 아니었다. 생각해보니 그랬다. 우산을 잊고 집을 나서버리는 바람에 비를 맞고 하교해야 했던 적이 중학교 2학년 시절 한 번 있었던 것이 기억났다. 맞벌이하시는 부모님에게 찾아와 달라고 전화 걸 수도 없었던지라, 지금보다 더 어렸던 소년은 자신을 책망하며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하지만 그 시절의 쿠니미 아키라에겐 카게야마 토비오가 있었다. 옆에서 활짝 편 우산을 들어 보이며, 여름 감기에 코를 한 번 훌쩍이고 같이 집에 가지 않겠냐고 물었던 그 옛 친구가. 우산을 잃고, 그를 얻었던 중학교 2학년의 일이 아직도 이렇게 생생한데. 고등학교 1학년이 되어버린 소년에겐 우산의 부재를 채워줄 만한 사람이 더는 곁에 존재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때와 비슷한 소리가 들려왔다. 그때보다 조금 더 멀리서, 쏟아지는 빗물 아래에서 코훌쩍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소년은 거의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카게야마……."


  그리고 불렀다. 친구라고 부를 수 있었던 그때 그 마지막 순간의, 그때 그 코트 위에서처럼 모든 걸 잃은 듯한 표정을 짓고 있던 옛 친구의 이름을.


  세상 모든 것이 슬로모션처럼 보였다. 오로지 이쪽을 향해 돌아보는 카게야마 토비오만이 그대로였다.






서러움 속의 소년들







  집으로 가는 길에 두 사람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무것도 물을 수 없었다.

  소년은 앞서 걸었다. 뒤따라오는 친구의 표정을 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여름마다 평소에 입던 대로 얇은 하얀 티셔츠에 까만 반바지를 입고서 흐르는 빗물을 맞고 서 있던 카게야마는 서러움이란 감정에 젖은 얼굴로 그곳에 서 있었다. 그곳이라 칭하기엔 조금 모호했다. 아오바죠사이 고교는 그가 있을 곳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절대로 세이죠의 져지를 입지 않을 것이고, 세이죠의 코트 위에 서지도 않을 것이며, 세이죠에서 쿠니미와 만날 일도 없을 거라고 단언하던 시절의 카게야마가 떠올랐다. 그러나 반년이나 다녀 제법 익숙해진 학교에서, 의외의―과거의―인물을 마주하다니. 쿠니미는 굳은 표정으로 카게야마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 표정은 얼마 가지 않아 빗물 머금은 모래더미처럼 무너졌다. 하얗게 질려서는 서러움이란 서러움은 모두 빗물 따라 눈물로 쏟아내고 있는 그의 얼굴이 시야에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누구보다도 지독한 자존심에 무슨 일이 있어도 울지 않았던 그때의 카게야마와는 다른 느낌이었다. 그래서 그랬던가. 달라서 그랬던 건가. 그의 입에서 "쿠니미."라고 제 이름이 나오기 전에 먼저 습관처럼 그 말을 내뱉었던 건. 우리 집에 가지 않겠냐며 중학생 때 습관 그대로 굴었던 건, 우는 카게야마를 처음 봐서인지 혹은 잃어버린 것 대신에 얻을 것이 필요했던 것인지, 소년은 알 수 없었다.



  그때의 카게야마는 소년에게 말했었다. 감정이 격해진 상황에서도 그 말만은 냉정했다. 나는 아오바죠사이에 가지 않을 거야. 당시의 소년은 멱살 잡고 있던 손에 힘을 풀며 답했다. 바라던 바야, 카게야마. 지금 와서 그 말을 후회하냐고 묻는다면 절대로 후회하지 않는다고 답할 자신은 있었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나은 답이 있었을 거라는 생각은 들었다. 물론 관계 개선인 도움이 되지 못했겠지만, 이미 뒤틀릴 대로 뒤틀려버린 사이를 돌려놓기엔 어느 답변도 모자랄 터였지만, 적어도 이렇게 마음이 불편하진 않았겠지.

  빗속에서 소년을 바라보며 쓰러질 듯 오열하는 카게야마를 보자마자 소년은 우산이 없단 사실도 잊은 채 달려나갔다. 생각하기도 전에 몸이 먼저 움직인 것이었다. 그렇게도 무심했던 소년은 그를 보자마자 결코 무심하기만 할 수 없었다. 극심한 습기에 조금 흐물거리기만 했던 교복 셔츠가 비에 젖었고, 제법 긴 머리카락을 타고 빗물이 흘렀다. 소년은 기절할 듯 구는 그를 부축하고 제 져지를 입혀주었다. 절대로 이 져지를 입지 않을 것이라 얘기했던 과거의 그를 떠올리니, 지금 그 져지를 입고서 오들오들 떠는 모습이 마치 현실과는 한참이나 동떨어진 듯한 기분이 들었다.



  길 위엔 두 사람뿐이었다. 뒤에서 따라오는 그의 얼굴을 보고 싶지 않아서 제법 빠른 걸음으로 걷는 쿠니미 아키라와, 그런 그를 따라 걷는 카게야마 토비오. 소년은 속으로 수많은 표정을 그려냈다. 이제 그 애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궁금해졌기 때문에. 상황을 그저 받아들이듯 초연한 얼굴로 따라오고 있을지, 여전히 감정 제어에 서툴러 잔뜩 인상을 쓰며 울먹이며 걸어오고 있을지, 혹은 여전히 중학생 때 코트 위에서 보았던 그 세상 모든 것을 잃은 듯한 표정을 짓고 있을지. 소년은 궁금했다. 하지만 절대 마주하진 않았다. 그는 과거의 사람이었기 때문에.

  직접 묻지 못할 질문을 빗방울 하나하나에 던져보았다. 어째서 그때 그랬었어. 그리고 왜 아오바죠사이에 오지 않겠다고 말했던 거야. 나는 너에게 어떤 사람이었어. 너에게 어떤 의미였었던 걸까. 소년은 과거에 젖은 얼굴을 돌려 두 사람이 걷고 있는 길옆에 펼쳐져 있는 어느 여름의 풍경에 시선을 두었다. 중학생 때 종종 저 풍경을 친구 삼아 셋이서 걸었던 적이 있었다. 다른 친구와 소년과, 그리고 카게야마와. 하지만 고등학생이 된 이후로 줄곧 버스로 등하교했기에 제대로 그 풍경을 마주할 틈이 없었다. 그래서 참 오랜만이었다. 마치 자신이 과거의 길을 걷고 있는 건지 혹은 그로부터 2년 뒤 현재의 길을 걷고 있는 건지. 소년은 파란 보리밭 위 느리게 떨어지는 빗방울 하나하나에 마지막 질문을 담았다.

  카게야마, 너는 어땠어.

  너는 나처럼 단 한 번이라도…… 이 길이 그리웠던 적이 있어? 라고.



  집 앞에 다다랐을 때 두 사람은 누구 할 것도 없이 모두 젖어 있었다. 그제야 소년은 카게야마의 얼굴을 주시했다. 예상외로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이었다. 딱히 모든 걸 놓아버리고 해탈했다기엔 조금 감정적이고, 예전처럼 감정 제어가 쉽지 않아 얼굴 가득 심술과 화만 품고 있다기엔 너무나도 태연무심해 보였다. 소년은 아파트 건물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습관처럼 주머니를 뒤적였지만 1년 전 현관문 잠금장치를 디지털도어락으로 바꾸었던 걸 뒤늦게 떠올렸다. 오늘, 나 진짜 이상하네. 과거에 얽매여있는 것 같이 굴기만 하고. 뒤에 있는 카게야마는 아무 생각 않겠지만, 괜히 머쓱해져 젖은 머리카락을 헤집어 턴 다음에 위로 향하는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젖은 손가락이 버튼 위에서 미끄러졌다.


  "……."

  "……."


  번호를 누르고 집에 들어서자 바깥과는 다른 따뜻하고 제법 건조한 공기가 두 사람의 몸을 감쌌다. 소년은 빗물로 첨벙이는 신발을 아무렇게나 현관 입구에 벗어던진 채 입구에서 서성이는 그에게 첫 말을 건네었다. 들어와. 카게야마는 그 말에 제겐 조금 긴 져지 소매를 만지작거리더니 마찬가지로 물로 출렁이는 신발을 벗고서 쿠니미의 앞으로 다가섰다. 씻으려면 욕실은 여기 있어. 최대한 무심한 척 배려했다. 예전엔 와봐서 알겠지만, 이라는 뒷말은 삼켰다. 카게야마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지만 그의 배려에 긍정하듯 불 꺼진 욕실로 들어갔다. 쿠니미는 불을 켜주려다 문득 그가 입고 있는 제 져지의 등에 커다랗게 영어로 놓여있는 아오바죠사이라는 단어를 보았다. 그에게 전혀 어울리지 않는 단어였다.

  카게야마를 큰 욕실에 넣어놓고 쿠니미는 안방에 작은 욕실로 들어가 대충 씻은 뒤 거실로 나왔다. 발코니 창 너머 보이는 세상엔 여전히 장맛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내리는 빗방울의 속도는 여전히 느렸다. 한창 더위에 녹아버려 길게 늘어나 버린 카세트테이프처럼, 그렇게 카세트에 넣으면 늘어져 멀쩡한 소리를 내지 못할 듯이. 곧 나올 카게야마를 기다리며 따뜻한 초코음료라도 준비하면서도 소년은 바깥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평소라면 매우 무심해, 모든 순간이 슬로모션처럼 보인다 하더라도 그저 넘겨 보였을 텐데. 느린 세상 속에 있는 것이, 과거로 되감기 해 돌아가는 것만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일까. 오늘따라 유독 신경 쓰였다.



  하지만 곧 욕실에서 아무 물소리도 들리지 않는다는 걸 깨닫고 나서야 쿠니미는 몸을 움직였다. 카게야마, 씻고 있어? 아무 대답도 없었다. 혹시나 싶어 화장실 문고리를 살짝 돌려보았더니 잠겨있진 않았다. 괜찮다면 들어갈게. 라고 말하고 몇 초를 기다려도 아무 기척이 없었다. 처음엔 동의도 없이 문을 열어젖혀 남의 알몸을 보는 것이 실례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자신도 결코 여유로운 사람은 아니었기에 소년은 무작정 문고리를 돌려 밀었다.


  "카게야마."


  그는 물이 가득 찬 욕조에 고개를 숙이고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쿠니미가 이름을 불러도 고개를 들지 않았다. 자는 건 아닌가 싶어 그에게로 가까이 다가섰다. 욕실 안 뜨거운 습기로 인해 빳빳하던 제 옷이 다시 눅눅해짐을 느꼈다. 카게야마. 과거에는 닿으려야 닿을 수 없었던 카게야마의 어깨 위에, 현재의 소년은 손을 얹어보았다. 축축하고 미끈한 피부가 오랜 시간 배구 연습으로 단단해져버린 손바닥에 감겨왔다. 카―게―야―마. 의도치 않았지만 제 목소리가 바깥의 빗물처럼 추욱 늘어졌다.

  그제야 고개를 드는 것이었다. 그러나 자신을 올려다보는 그 이름의 주인은 얼굴 가득 설움을 가득 품은 채로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었다. 그러고선 말했다.


  "……토비오."


  토비오라고 불러줘. 예상하곤 있었지만 그의 입에서 나온 첫마디가 그것이었기에 소년은 당황했다. 토비오라고 불러 달라며 또다시 감정을 목욕물에 흘려보내는 카게야마가, 그의 머리카락을 타고 흐르는 물방울과 그의 목소리와는 다르게 여전히 멀쩡하게 제 속도로 보였다. 그는 현재의 사람이었다. 천천히, 슬로모션처럼 느리게 움직이던 건 자신이었다. 과거에 얽매여서, 그를 보는 순간 과거의 일밖에 떠올리지 못했던 자신이야말로 바깥에 떨어지는 빗방울처럼 느린 존재였다. 카게야마는 달랐다. 적어도 그를 보지 못한, 알지 못한 시간 동안 그에겐 소년은 모를 법한 일들이 많이 일어난 것이었다. 엄연한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사람이었다. 소년은 모르는.


  "그래, 토비오."


  토비오라고 불러주었다. 그의 그가 불러줄 법한 말투로. 그제야 카게야마는 다시 고개를 숙이고 크게 마음 놓고 오열했다. 소년도 그렇게 울고 싶었다. 그가, 제겐 어울리지 않는 아오바죠사이에 있을 법한 이유는 단 한 가지였으므로. 우산을 잃고, 그를 얻었던 중학교 2학년의 시절처럼 오늘도 그랬다고 생각했었는데. 다시 그때처럼 좋은 관계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는데. 비가 오면 흔쾌히 우산을 내밀어, 우산이 되어주는.

  하나를 잃어야지만, 하나를 얻는 건가……. 라고 생각했던 불과 한 시간의 자신을 떠올렸다. 잘못된 생각이었음을 이제야 깨달았다. 꼭 그렇지는 않구나. 하얗게 습기 찬 욕실 안에 카게야마의 젖은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다시 한 번만. 다시 한 번만 더 토비오라고 불러줘. 서러운 목소리였다. 쿠니미는 뜻을 알 것 같았지만 묻지 않았다.

  괜히 서러웠기 때문에. 그 서러움도 이젠, 잃었던 제 속도를 찾아 가슴에 저미기 시작했다.




  

attach_money결제선결제선 아래 내용은 유료로 판매합니다.


안개님의 창작활동을 응원하고 싶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