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40일 간의 유예 AU


  "사랑만 하다가 죽어 버리는 것도 나쁜 일은 아니지."


  그 말, 꽤 쉽게 하시네요. 무미건조한 목소리가 퀴퀴한 지하실 안 공기를 유랑했다. 소리는 어딜 향해야 할지 전혀 알지 못하는 듯 이 벽에 스미고, 저 바닥에 굴렀다. 카게야마는 들고 있던 자물쇠를 바닥에 내던지며 옅은 빛이 새어 들어오는 오래된 지하실 문에 기대서있는 오이카와의 앞으로 걸어갔다. 쇳덩이가 바닥에 곤두박질치며 둔탁한 소리를 냈다. 카게야마는 그 울림이 인간의 두개골을 망치로 깨는 소리와 같다고 생각했다.


  선배, 어때요. 제가 디스트로이라는 사실을 두 눈으로 확인하게 된 소감은. 카게야마는 다른 한 손에 들고 있던 녹슨 열쇠로 공중에 포물선을 그려냈다. 묘하게 미소 지으며 카게야마를 주시하던 오이카와의 두 눈이 열쇠의 궤도를 따라 바닥으로 가라앉았다. 팅팅. 열쇠가 바닥에 몇 번 튀더니 금세 바닥에 누워 고요함을 연기했다.


  디스트로이는 달랐다. 손상된 전두엽을 품고 세상에 나와 한평생 여러 가지를 결여한 채 살아간다. 감정이입과 공감대 형성의 부재는 물론이요, 행복하고 평범한 삶은 그들의 언어에 애초에 존재하지도 않았다. 그러한 공백에 수혈이라도 하듯 그들은 살인과 섹스로 채워 넣었다. 오이카와는 제 앞에 떡하니 서서 지하실의 분위기를 점자 읽듯 더듬는 디스트로이를 응시하며 운을 떼었다. 실제로 보니 그렇게 놀랍진 않아. 카게야마의 뒤에 가득히 매달린, 이제는 신분조차 알 수 없을 시체의 파편으로 손가락을 올려다보였다.


  이유란 없었다. 디스트로이에게 살인은 습관, 폭력은 일상이었다. 오이카와는 그걸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어머니라는 단어를 망막에 담을 때마다 그 위에 항상 디스트로이라는 다섯 글자가 늘 겹쳐 보였기 때문이었다. 아주 재수 없지, 우리 아버지는 어떻게 디스트로이를 사랑하는 셧이 되어서 나를 셧으로 낳았을까. 오이카와는 덤덤한 말투로 한 마디씩, 지독하게 몸을 짓눌러오는 썩은 시취 위에 차곡차곡 쌓아 올렸다. 카게야마는 테이블 위에 잔뜩 올려둔 각종 날붙이를 메마른 두 손으로 쓸어보았다.


  "그리고 재수없게도 운명의 대상이,"

  "디스트로이인 카게야마 토비오인거죠."


  빌어먹을 애송이, 말 끊지 말라 했지. 타인의 말을 무지르는 것이 쉬운 만큼, 디스트로이에겐 누군가의 목숨을 끊기도 매우 쉬웠다. 죄책감을 느끼지도 않고, 연민에 얽매이지도 않고. 카게야마는 주머니에서 작은 오토매틱 나이프를 하나 꺼내 들어 천장에 매달려있는 끈을 하나씩 끊어나갔다. 오이카와는 팔짱을 끼고 그런 카게야마의 모습을 보며 비소를 보였다. 지하실 바닥에 둔중하게 울려 퍼지는 고깃덩이가 추락하는 소리가 잇따랐다.


  "그럼 토비오는 어때, 셧인 내가 너에게 이렇게도 맹목적인 모습이?"

  "누가 보면 오이카와 선배가 디스트로이인 줄 알겠어요."


  오이카와는 셧, 카게야마는 리스인 척하는 디스트로이였다. 카게야마는 첫눈에 오이카와가 셧임을 알 수 있었다. 남들보다 더 사랑스럽고 부드러운 외모에 가만히 있어도 주변 사람이 꼬이는 성품. 누가 봐도 오이카와는 셧이었다. 하지만 그건 오이카와도 마찬가지였다. 오랜 시간 평범한 리스인 척 살아오던 카게야마를 한눈에 디스트로이라 못 박아버린 것이었다. 나는 너를 처음 본 순간 정말 우스운 생각이 들었어. 뭔데요. 앞으로 너도나도 서로 때문에 많이 울겠구나, 라고.


  "정확하게 말하면 너는 이블에 가깝지."


  너는 사람을 죽이진 않잖아? 카게야마는 주저앉아 바닥에 너저분하게 흐트러진 시체 덩이를 검지로 한 번 쓸어보았다. 이미 메말라 비틀어진 검붉은 색 피가 가루가 되어 바닥에 퍼졌다. 사뿐사뿐. 틀렸어요, 오이카와 선배. 이블은 그렇게 정의되지 않아요. 그저 공격 충동을 느끼는 디스트로이를 넘어서서, 본인 내면의 사악함을 깨달은 자가 이블이죠. 카게야마는 흥미를 잃은 무심한 눈으로 아래로 침전한 가루들을 멸시하며 일어서 발로 시체를 걷어차 안녕을 고했다. 잘 가요.


  오이카와는 가운 주머니에서 붉은색 담뱃갑을 꺼내 담배 두 개비를 제 손에 담았다. 하나는 제 입에 물고, 다른 하나는 카게야마의 입에 물려다 주고 제 것에다 먼저 불을 붙였다. 카게야마는 얼굴 근육만으로 무슨 짓이냐는 신호를 보냈지만, 오이카와는 불을 붙인 자신의 담배를 카게야마의 것에 맞대었다. 두 사람은 모두 필터 끝이 축축이 진한 타액으로 차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한 번 질겅이자 스며들었던 침이 새어 나왔다.


  "디스트로이가 의사라니, 어디 정신 나간 거 아냐."

  "왜요."

  "어느 멍청한 병원이 디스트로이를 말이야. 응."


  카게야마는 난생처음 물어보는 담배를 피우지 않고, 그저 타들어 가는 반대쪽 끝을 보기만 했다. 오이카와는 지하실 속 악취를 지우려고 하듯 열심히 숨을 들이쉬고 내뱉었지만, 카게야마는 그 지독한 담배 냄새를 맡으며 지하실 문 사이로 파고들어 오는 빛에 환해진 연기를 바라보기만 했다. 카게야마는 오이카와의 말에 회피를 택했다. 병원장인 본인의 아버지에겐 묻지 않고 일개 의사인 자신에게 묻는 오이카와를 이해할 수 없어서였다.


  저택 아래의 어두운 밀실 안에는 온갖 감각이 공존했다. 입에 닿는 씁쓸한 담배의 맛과, 눈을 파고드는 무심한 어둠과, 시도 때도 없이 물씬 찔러오는 갖은 악취와, 겨울 추위에 얼어버린 차가운 열 손가락 끝에 닿는 서로의 체온과, 텅 빈 귓속을 가득 채워오는 상대방의 들뜬 숨소리까지. 오이카와는 피부에 닿을 만큼 줄어든 담배꽁초를 바닥에 내던지고 발로 짓이겨 숨을 죽였다.


  "신경과 전문의라니, 꽤 의도적이잖아?"

  "병원은 좋아요. 제가 살인을 저지르지 않아도 죽은 사람을 볼 수 있어요."


  꽤 다양한 방법으로 죽음을 발견할 수 있거든요. 셧이라는 사랑스러운 인종으로 태어나, 결국 의사의 길을 걸으면서 타의로 소아청소년과를 택한 오이카와와 다르게, 카게야마는 자의로 신경과를 택했다. 이유는 피를 보지 않아도, 칼로 사람을 찌르지 않아도 사람이 고통스럽게 죽어가는 모습을 볼 수 있어서였다. 그래서 의도적이라는 거야, 토비오. 그래도 저는 사람을 죽이진 않아요, 죽는 모습을 볼 뿐이지.


  오이카와는 카게야마의 입술에 제 입술을 포개며 카게야마의 기다란 손가락에 꽂힌 담배를 집어 저 뒤로 던졌다. 시체에 닿아 큰불이 일어날지, 그저 냉한 시멘트 바닥에 떨어져 시들어갈지 모르는 일이었다.


  보는 시선이 많아요. 카게야마는 저기 어디엔가 병에 담겨있을 수많은 눈알을 생각하며 오이카와에게 흥분을 내뱉었다. 아무렴 어때, 죽은 눈인걸. 오이카와는 살아 숨 쉬는 커다란 동공으로 카게야마의 입안으로 숨을 전했다. 나는 살아 있어. 저들과는 달라. 나는 평생 살며 여자들이 안아달라 유혹해도 단 한 번도 넘어간 적 없어. 이렇게 너와 같은 숨을 공유하기를 얼마나 기다렸는지 몰라. 네 세상은 나뿐이고, 내 세상은 너뿐이야.


  카게야마는 진득하게 입을 맞춰오는 오이카와를 받아주면서, 누군가의 굳은 피가 가득한 벽을 손톱 세워 긁어대었다. 그러자 응고된 혈액 조각들이 바닥으로 떨어지며 그 사이사이로 균열이 졌다. 마치 오이카와와 카게야마 사이의 깊은 운명의 골짜기 같았다. 그 빌어먹을 50%의 확률이 우리를 이렇게 불행하게 만들었어요. 당신도 셧, 나도 셧. 이랬다면 우리는 분명 행복했을 텐데. 내가 우리 어머니를 따라 셧이 되고, 당신도 아버지를 따라 셧이 되었다면 우리는 미치도록 뜨거운 사랑을 했을텐데.


  "빌어먹을 운명이죠."

  "그래. 이 운명 아래에서, 네가 언젠가 나를 죽여도 사랑만 하다 네 손에 죽는 것도 결코 나쁜 일은 아니지."


  그 말, 지나치게 쉽게 하시네요. 오이카와의 목덜미에 주어 없는 그 무미건조한 문장이 맴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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