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GM: Yellow Room - Yiruma

―오른쪽 클릭하고 연속재생

―츠키카게 합작 참여: http://fin.mireene.com/moonlight/001.html





0.

 

  오래도록 염두에 두고 있던 여행이었다.

  처음 입원하던 날 츠키시마는 카게야마에게 공책 하나를 건넸다. 깔끔한 민무늬의 노란 공책이었다. 한쪽 눈이 반쯤 감긴 채로 생사의 갈림길에 위태로이 서 있으면서도 손에 꼭 쥐고 있던 공책을 건네며 말했다. 나중에, 언젠가 꼭 가고 싶어. 죽기 전에, 왕님이랑. 카게야마는 두 손 가득 물감이 가득 묻은 츠키시마의 손을, 떨리는 제 손으로 버겁게 감싸 잡으며 울먹였다.


  - 그래, 그러자. 꼭. 내가 약속할게.


  정신을 차리니 불과 반나절 만에 주변이 생소한 언어와 분위기로 가득 차올랐다. 겉모습부터 말투까지 모두 낯선 사람들 속에서 카게야마는 어색함에 어쩔 줄을 모르고 이리저리 두리번거렸다. 그 모습을 본 츠키시마는 어설프게 웃더니 방황하는 카게야마의 옷자락을 잡아끌었다. 그쪽 아니고 저쪽. 그 말에 카게야마는 들고 있던 공책을 뚫어져라 쳐다보다 츠키시마의 손가락이 향하는 곳을 향해 시선을 옮겼다.

  2시 반 버스, 성인 두 명이요. 매표소에서 말이 통하지 않아 버벅대던 카게야마를 뒤에서 바라보던 츠키시마가 말했다. 판매원은 멀찍이 떨어진 곳에 앉아 있던 츠키시마를 한 번 훑더니 카게야마에게서 돈을 받아 표 두 장을 건네었다. 카게야마는 아무 도움이 되지 못하는 자신이 부끄러웠던 건지 고개를 푹 숙인 채 츠키시마에게로 걸어갔다. 미안, 나 혼자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어서. 츠키시마는 희미하게 웃으며 곧게 뻗은 손으로 그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아직은 혼자서 하는 게 익숙하지 않아서 그런 거야.


  버스를 타고 이동하는 동안 츠키시마는 아무 말도 없었다. 볕이 잘 드는 창가에 앉아 묵묵히 차창 너머로 흘러가는 풍경을 감상할 뿐이었다. 빠른 속도로 스쳐 가는 포플러 나무도, 저 멀리 펼쳐진 드넓은 금빛 호밀밭도, 츠키시마는 두 눈 가득 담아내고 있을 터였다. 카게야마는 여유로운 오후의 햇빛이 머무는 츠키시마의 노란 머리카락을 만지작대다가, 그의 어깨에 머리를 대고, 꼭 맞잡은 손의 온기를 느꼈다. 두 사람 사이엔 어느 대화도 없었지만, 그의 손은 그가 여전히 살아있음을 알려주었다. 사소하지만, 그것만으로 위안이 되었다.

  덜컹거리는 버스 안은 고요했다. 승객 수는 적었지만, 모두 창가에 앉아 츠키시마처럼 침묵을 유지했다. 카게야마는 그 고요의 틈에 귀를 기울이며 츠키시마의 손을 조금 더 세게 끌어다 잡았다. 심장 박동이 조금 더 강하게 전해져왔다. 츠키시마. 조용히 그의 이름을 불러보았다. 하지만 대답이 없자 한 번 더 불러보았다.


  "츠키시마?"

  "……어."

  "……."

  "왜?"


  살짝 늦은 츠키시마의 대답에 혹시나 싶어 카게야마는 놀란 눈으로 츠키시마를 올려다보았다. 잠깐 졸았던 건지 졸음에 짓눌린 눈으로 츠키시마는 그를 내려다보았다. 두 사람의 시선이 애매한 공중에서 흐릿하게 교차되었다. 오랜만에 제 시선보다 높게 위치하게 된 츠키시마의 깊은 금빛 눈동자를 보던 카게야마의 푸른 바닷빛 눈동자가 소금기 가득한 눈물을 머금었다.


  "왕님, 요즘 너무 자주 우는 거 아닌가."

  "다 너 때문이잖아."

  "미안."


  잡았던 손을 빼 눈물을 닦아주려는 츠키시마의 손을 도리어 세게 잡았다. 절대로 놓지 않을 거라는 것처럼. 츠키시마는 고집 센 카게야마의 행동에 잠시 멈췄다가, 그의 몸을 잡아당겨 제 가슴팍에 얼굴을 맞대게 끌어안았다. 나 아직 살아있으니까 그만 좀 울어. 청승맞게. 그의 심장 소리를 누구보다도 가장 가까이서 전해 들으면서도 카게야마는 불안했다.


  세상에서 제일 좋아하는 연인인, 츠키시마 케이가 시한부 인생을 살고 있었기에. 하지만 불안은 잊으라는 듯, 버스는 살랑이는 가을바람을 타고 어디론가 향했다.





완전한 사랑을 바라고





1.



  아침에 눈을 뜨면 나무 의자에 기댄 츠키시마가 창문 너머의 세상을 즐기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카게야마는 게슴츠레 뜬 눈으로 한참이나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다리를 창문틀에 올린 채 무릎 위에 스케치북을 높고 세상을 제 방식대로 열심히 그려내는 그의 모습이, 너무나도 눈물겨웠다. 얼마나 반복해서 그린 건지 닳아서 뭉툭해진 연필을 떨리는 손으로 간신히 붙잡고서 가을 풍경을 담아내고 있었다. 카게야마는 혹시나 눈물 참는 제 모습이 보일까 봐, 괜히 아침 햇살에 뒤척이는 척하며 팔을 들어 올려 얼굴을 가렸다. 그러고선 베개와 팔 사이의 틈으로 햇빛 아래의 츠키시마의 모습을 두 눈에 담았다.


  "왕님, 이제 좀 일어나지."


  츠키시마는 오랜 스케치로 뻐근했던 건지, 몇 차례 고개를 돌리다가 여전히 침대에 누워있는 카게야마에게 시선을 두었다. 그 시선을 온몸으로 느끼면서도 카게야마는 그저 가만히 잠든 척 연기했다. 연필의 흑심 가루로 새까매진 츠키시마의 커다란 손을 몰래 바라보는 시선이 축축해진 것을, 그에게 들키고 싶지 않았다.


  프랑스의 한 작은 시골 마을이었다. 츠키시마의 오래된 공책엔 이곳에 대한 이야기로 가득했다. 일본에선 어떻게 올 수 있는지, 우리에겐 무엇이 필요한지, 그곳에선 무엇을 할 것이고 무엇을 볼 것인지. 카게야마는 병실에 누워 호흡기에만 의지해 겨우 숨을 쉬던 츠키시마의 곁을 지키며, 그가 건넨 공책 속 풍경을 수도 없이 머릿속에 그려나갔다. 곤히 잠든 츠키시마의 손가락을 만지작거리다가, 언젠가 그의 손가락이 닿았을 글씨와 삽화를 쓸어내리며 그와의 마지막 여행을 준비했다.

  이곳에 도착한 이후로 츠키시마는 하루도 빠짐없이 밖에 나가 그림을 그렸다. 마을 깊이 들어오기 전 시내에서 잔뜩 구매한 유화 물감으로, 작은 캔버스 위에 마을의 풍경을 칠하고 또 덧칠했다. 카게야마는 집안에서도 자신이 그를 볼 수 있는 곳에다 츠키시마를 앉혀두고 시도 때도 없이 그의 존재를 확인했다. 집안일을 돕는다는 조건으로 얹혀살게 된 노부부의 집 안 구석구석을 청소하면서도 때가 되면 창가로 달려가 드넓은 하늘에 그의 이름을 외쳤다.


  "츠키시마!"


  츠키시마에겐 답할 기력이 없었다. 하지만 나무 그늘에 앉아 그림을 그리다 말고 고개를 들어 카게야마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대답을 건네었다. 정말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노란 야생화가 가득한 들판에서 무언의 웃음을 건네는 츠키시마를 보는 것만으로도.





2.



  죽기 전 마지막 여행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늘 두려웠다.

  카게야마는 자다가도 몇 번씩이나 깨어나 츠키시마의 가슴팍에 귀를 대었다. 혹시나 심장이 멈추진 않았는지, 숨이 멎어버린 건 아닌지. 자면서도 늘 혹시나 하는 불안에 시달렸던 카게야마는, 종종 잠에서 깨어나 츠키시마가 살아있음을 확인하고자 했다. 그러고선 얇은 옷자락 너머로 전해져오는 뜨거운 삶의 열기에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창 너머로 달빛이 은은하게 내려앉은 츠키시마의 얼굴을 몇 차례 조심스레 쓸다가, 그가 편안히 잠들어 있음을 확인했다. 그 모습은 무어라 말로 표현할 방법이 없었다. 눈물이 어느 단어도 새어나가지 못하도록 말문을 막고 흘러내렸다. 카게야마는 자고 있는 그에게도 우는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아 벽을 마주한 채 눈물을 삼켰다.


  "뭐라고 하셨어?'

  "왕님의 검은 머리가 예쁘대."


  그 말 벌써 수십 번은 들은 것 같은데. 츠키시마가 그 말을 프랑스어로 전달하자 주인집 할머니가 큰소리로 웃으며 카게야마의 머리에 꿀밤을 먹였다. 그 모습을 본 할아버지와 츠키시마도 같이 따라 웃었다. 카게야마는 혼자서만 상황 파악을 하지 못한 채 어리둥절해 했다. 할머니와 할아버지의 얼굴을 번갈아 두리번거리다 또다시 츠키시마에게 물었다. 왜 다들 웃는 거야? 언어를 몰라서 그런 건지, 분위기를 읽지 못하는 특유의 둔한 성질 때문인 건지. 카게야마는 츠키시마의 휠체어를 가져오면서도 끈질기게 물었다.


  "왕님."


  이제 말 좀 배워둬야 하지 않을까. 각종 미술용품이 들은 상자를 들어 올리자 유화 물감의 향이 진하게 풍겼다. 츠키시마는 휠체어에 앉아 그 상자를 받아들이며 다시 물었다. 언제쯤이면 나 없어도 할머니 말을 알아들을 수 있을까. 언제까지고 내 도움만 받을 순 없는 거잖아. 카게야마는 답하지 않았다. 그저 츠키시마가 자신의 일그러진 표정을 돌아보지 못하도록 고개를 푹 숙이고선 그의 등 뒤로 가 묵묵히 휠체어를 밀었다.


  누구나 사랑하는 사람의 마지막을 준비하기엔 미숙할 터였다. 카게야마도 마찬가지였다. 그저 텔레비전 속 드라마나 소설의 한 대목으로만 만나던 죽음이라는 것을 현실에서 마주하게 될 줄 과거의 카게야마는 알 리가 만무했다. 그것도 사랑하는 사람을 죽음으로 잃기에는 한참이나 이른 20대 중반이라는 나이에. 카게야마는 여전히 자기보다 크지만 이제 어디에 기대어 앉지 않으면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츠키시마를 내려다보았다. 이 뒷모습도 곧 있으면 보지 못하겠지. 그게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코끝이 시큰해졌다.


  그래서 얼른 불어를 배워두라는 츠키시마의 말의 의도는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이 없어도 나 혼자 살아갈 수 있기를 바라는 것이겠지. 라고 카게야마는 생각했다. 하지만 카게야마는 츠키시마의 뜻대로 행동하지 않았다. 할아버지와 사소한 대화를 나눌 때도 충분히 알아들을 수 있을 법한데도 다른 생각을 한다든가, 일부러 대화가 통하지 않는 척하며 츠키시마의 도움을 받고자 했다. 멍청한 건 고등학생 때부터 지금까지 여전하다는 꾸지람을 들어도 카게야마는 그저 엉성하게 웃어 보이며 상황을 모면해 보였다.

  꼭 그래야지만 츠키시마를 더 오래 볼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3.



  "뒤돌아보지 말고 가만히 앉아있어."

  "지루해."

  "말 또 안 듣는다."


  츠키시마는 나무 그늘에 앉아 캔버스와 물감을 꺼내 들었다. 카게야마는 멀찍이 떨어져 앉아 그 모습을 보다가 츠키시마의 단호한 한 마디에 입을 비쭉 내민 채 앞으로 돌아  앉았다.


  그렇게 뒤돌아선 제 앞엔 그림과도 같은 광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끝없이 이어지는 꽃밭과 광활한 바다를 보자 카게야마는 문득 츠키시마의 노란 공책 속 그림들을 떠올렸다. 색연필만으로 간단하게 그려낸 삽화 속 장소가 현실에 그대로 재현되어 있었다. 츠키시마는 얼마나 이곳에 오고 싶었던 건지 단 한 번도 제대로 말해준 적이 없었다. 허나 죽음에 다가섰던 순간에도 이곳에 오고파 했고, 또 그때 건넨 공책에도 이곳에 대한 이야기뿐이었기에 그가 꽤 이곳을 좋아하고 있었다는 것을 지레짐작해볼 뿐이었다.

  카게야마는 제 주변에 만개한 노란 야생화의 이름을 알지 못했다. 다만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그 누군가를 떠올리게 했기에 쉽게 정이 갔다. 색소가 옅어 희미한 듯하면서도 밝게 빛나는 츠키시마의 머리카락이 떠올라 그 작은 꽃잎을 조심히 어루어 만져보았다. 하지만 그럴수록 외면하고 싶은 사실이 문득 기억의 저편에서 바람 타고 흐르듯 넘어오는 것이 느껴졌다. 이 꽃도 얼마 안 있으면 계절을 타고 쉽게 져버리듯이 츠키시마도…… 연약한 꽃잎이 제 손길에 바스러질까봐 그만 손을 거두었다.


  "츠키시마."

  "……."


  츠키시마? 몇 차례 불러도 답이 없자 순간 철렁했던 카게야마는 그림 그릴 거니까 절대로 뒤돌지 말라는 츠키시마의 말을 잊은 건지 몸을 돌려 동산 위 나무 아래의 츠키시마를 찾았다. 갑자기 돌아서는 카게야마의 몸짓에 오히려 놀랐던 건지 츠키시마의 당황한 표정이 멀리서도 선하게 보였다. 듣고 있어, 왕님. 츠키시마는 혹시나 싶어 긴장했던 카게야마의 기분을 알지 못한 채 다시 여유롭게 캔버스 위에 붓을 올렸다.


  "대답…… 빨리 좀 해줘."

  "알았어."


  조금만 답이 느려져도 마음을 졸이게 되는 현실이 너무나도 가혹했다. 계속 그림을 그릴 테니 다시 뒤를 돌라는 츠키시마의 말을 들어도 카게야마는 자꾸만 미루기만 했다. 예전처럼 자신을 위에서 내려다보는 그 모습이 반가워서였다.


  언제나 자신보다 높은 곳에서 내려보았다. 첫 만남의 순간에서도 그는 그랬다. 배구공을 한 손으로 번쩍 치켜들고선 여유로운 눈빛으로 독설을 내뱉던 그의 모습이 아직도 잊히지 않았다. 어린 카게야마가 제 자존심에 주변 사람들을 힘들게 만들었듯이, 어린 츠키시마도 제 자존심에 홀로 원치 않은 길을 걸었던 적이 있었다. 그래도 츠키시마는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기고 고난을 극복해냈다. 그 모습을 모두 멀찌감치 옆에서 바라보던 카게야마에게 츠키시마란, 그래서 참 대단한 사람이었다.

  키도 크고 자존감도 높았던 그가 왜소하게 보였던 건 언제부터였을까. 츠키시마가 언제부터 병을 앓고 있었던 건지 카게야마는 알지 못했다. 마치 평생 그 노란 야생화의 이름을 모른 채 지내왔던 것처럼, 츠키시마가 아팠던 사실도 곁에 있으면서도 눈치채지 못했던 것일지도 몰랐다. 그래서 늘 자책했다. 눈치 없고 어리석은 사람이라, 사랑하는 사람이 아픈데도 알아차리지 못하다니. 후회와 함께 밀려오는 상실과 책망에, 병실 침대 머리맡에 엎드려 훌쩍이던 카게야마의 손을 붙잡으며 츠키시마는 말했었다.


  - 왕님, 끝까지 이기적인 생각뿐이네. 왜 혼자서 다 짊어지려고 하는 거야. 멍청하게.


  그 말을 떠올리며 카게야마는 무릎을 껴안았다. 그러자 언제 묻은 건지 모를 테레핀 오일의 향이 코를 물씬 찔러왔다. 손가락을 코밑에다 가져다 대고 한참이나 그 냄새를 맡았다. 츠키시마에게서 나는 냄새였기 때문이었다. 제대로 기억하지도 못할 정도로 희미한 어느 과거에, 자신을 껴안은 츠키시마로부터 지독히 풍겨오는 그 냄새에 질색하며 밀어냈던 적이 있었는데. 침대에 누워 팔베개를 해주면서도 그 냄새를 지우지 못했던 츠키시마는 종종 미안해하곤 했다. 하지만 카게야마는 이제 그 냄새가 고팠다. 조금만 더, 아주 조금만 더 오래 손가락 위에 남아줬으면 했다.





4.



  - 나, 언제부터 츠키시마가 그림을 그렸던 건지 기억이 잘 안 나.


  언젠가 자신이 던졌던 질문을 카게야마는 에메랄드빛 바다에서 건져냈다. 건강했던 모습의 츠키시마는 조각 케이크를 먹다 말고 고개를 들어 카게야마를 바라보았다. 그때도 분명 손에 물감이 가득 묻어있었던 것만 같았다. 고등학생 때까지만 해도 같은 배구부에서, 같은 코트 위를 뛰었던 츠키시마였는데. 대학교에 다니면서 잠시 떨어져 있던 사이에 츠키시마는 배구공 대신에 뾰족이 깎은 연필과 스케치북을 들고 있었다.


  - 무슨 질문이 그래?

  - 그냥 궁금해서.


  츠키시마는 그 말을 듣자마자 특유의 언짢다는 표정을 지으며 옆에 놓인 스케치북을 들어 올렸다. 대체 뭘 그렇게 그리는 거야? 딱히 전시한다든가 대회에 나가려고 그리는 건 아니잖아. 카게야마가 스케치북 속 그림을 보려고 하자 츠키시마는 뒤로 내빼면서 절대로 보여주는 일은 없을 거라며 그를 약 올렸다.


  - 그림은 말이야. 보이지 않는 걸 그릴 수 있어. 카메라로 사진을 찍으면 당연히 모든 순간을 담아낼 수 있기야 하지만, 세상엔 사진만으로는 표현해낼 수 없는 것들이 많으니까.

  - 그런 게 뭔데?

  - 그건 왕님이 제대로 생각해보시지.


  보이지 않는 것. 당시엔 그게 무엇인지 알지 못했던 카게야마는, 그 후로 몇 년이 지나, 일본에서 멀리 떨어진 프랑스의 한 작은 시골 마을에서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





5.


  늦은 아침 눈을 뜨니 츠키시마가 웬일로 그림을 그리지 않고 침대에 누워 카게야마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무슨 일이야, 오늘은 그림 안 그려? 잠긴 목소리로 서툴게 묻는 카게야마에게 그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저 떨리는 손으로 카게야마가 매일 밤 몰래 그랬듯 그의 뺨을 쓰다듬어 주었다. 미약하게 떨리는 그의 손놀림에, 그 물감 가득 묻은 손이 심장을 소중하게 감싸 쥐듯 아릿한 느낌이 온몸에 흘렀다. 얼마 전에 보았던 노란 야생화와도 같은 츠키시마의 눈 속에서 카게야마는, 허우적대며 숨이 멎을 것만 같이 구는 제 모습을 발견했다. 두 사람 사이에 흐르는 정적을 깨고 무어라 말을 꺼내고 싶었지만, 서러움이 입안 가득 차올라서 정작 하고 싶은 말은 한마디도 내뱉을 수 없었다.


  식탁에 버겁게 앉아 할머니와 대화를 나누며 아침을 먹는 츠키시마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며칠 동안 세차게 비를 뿌리던 비구름은 가시고, 눈이 부시게 화창한 늦가을의 하늘 덕분인지 츠키시마는 오늘따라 더 행복해 보였다. 하지만 카게야마는 마음이 무거웠다. 곧 있으면 이곳도 추워질 테고, 두꺼운 옷은 많지 않았다. 츠키시마가 얼마 더 버틸지 모르는 일이었다. 반년 전 병원에 입원해있을 때보다는 말도 많이 하고 혼자서 그림도 그릴 수 있을 정도로 생기를 찾은 편이었지만, 추운 겨울을 나기에는 더없이 약했다. 그의 모습을 창망하게 바라보던 카게야마는 또다시 인중에다 손가락을 대고 츠키시마의 냄새를 맡았다.


  "츠키시마."

  "어."

  "춥지 않아?"


  여느 때와 다르지 않게, 휠체어는 고르지 않은 땅 위를 굴렀다. 검은 머리의 카게야마는 그 휠체어를 밀고, 노란 머리의 츠키시마는 휠체어에 앉아 미술용품이 가득 들은 상자를 끌어안은 채로. 카게야마의 질문에 츠키시마는 별 답이 없었다. 하지만 카게야마가 걱정할 걸 알았던 건지 고개는 도리도리 저어보았다. 카게야마는 그의 고갯짓을 알아차리고선 다른 질문을 했다.


  "오늘은 어떤 그림 그릴 거야?"

  "저번에 그리던 거 마저 그리려고."

  "비 오기 전에 그렸던 거?"


  어. 그러니까 오늘은 절대로 뒤돌아보면 안 돼. 카게야마는 그 말을 들으며 츠키시마의 상자를 바닥에 먼저 내려놓았다. 그리고 내려달라는 듯 팔을 앞을 향해 뻗은 츠키시마를 끌어안았다. 그러자 츠키시마가 두 팔로 카게야마를 있는 힘껏 세게 안았다. 그러고선 한참 동안 움직이지 않고 카게야마의 어깨에 고개를 파묻은 채 가만히 있기만 했다. 츠키시마. 그 울림이 먼 곳으로 흩어지지 못하고 두 사람의 어깨너머에 맴돌았다. 케이. 그 이름을 오랜만에 카게야마의 입에서 들어 놀란 건지 츠키시마는 몸을 떼고 카게야마의 얼굴을 마주했다.


  "케이."

  "……."


  두 번째로 그 이름이 메아리치자 츠키시마는 카게야마의 벌어진 입술에 제 입술을 맞대었다. 오랜만에 사뿐히 맞춰오는 그 입술을 카게야마는 잠자코 받아들였다. 예전엔 잠시 입을 맞추어도 흥분을 쉬이 가라앉히지 못한 채 더 멀리 나아가곤 했었는데. 현재의 두 사람은 그저 숨을 나누기만 했다. 애욕에 가득 찬 질척거리는 것이 아닌, 조금 더 오래 곁에 남아달라는 진심만이 남아버린 건조하고 버석한 입맞춤이었다. 서로가 살아있음을, 여전히 입 밖으로 숨을 내뱉고 있음을 똑똑히 제 몸속 가득 새겨 넣기 위한 의식과도 같은 입맞춤이었다.


  카게야마는 츠키시마를 나무 그늘에 앉혀놓은 뒤 아무 말없이 며칠 전 앉았던 곳에 자리를 잡았다. 그러고선 틈날 때마다 그의 이름을 불렀다. 평소엔 귀찮다는 듯이 무엇하러 자신의 생사를 확인하냐는 듯 굴었던 츠키시마는, 그림을 그리면서도 용케 잘 대답했다. 그 목소리를 들으면서도 단 한 번도 카게야마는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비가 내려서 그런지 전보다는 많이 시들해진 가을의 늦은 야생화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추켜들고서 구름 한 점 없는 늦가을의 하늘과 유난히 잠잠한 바다의 그 경계선을 찾았다.



The Cliff Walk at Pourville / Claude Monet
The Cliff Walk at Pourville / Claude Monet


  “아.”


  맞닿아 있었다. 저것 조차도 츠키시마의 공책이 말한 그대로였다. 바다가 너무 눈부셔서 하늘과 바다의 경계를 쉽사리 찾지 못할 것이라는 츠키시마의 말대로, 하나가 된 세상이 시야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그렇게 늘 하나이고 싶었다.

  다투고 토라지고, 자존심 세우느라 못난 말로 상처 주고 서로를 외면하게 되더라도, 언제나 같이 맞닿아 있던 때를 그리워하며 서로를 찾아 돌아오 듯. 아무 말 하지 않고,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서로가 곁에 있어주는 것만으로도 완벽한 순간이라 외칠 수 있듯. 츠키시마의 이름을 부르지 않아도 살아있음을 확인할 수 있도록, 언제나 저 바다와 하늘처럼 두 사람이 하나였으면 했다.


  “츠키시마.”


  코끝이 어릿해져 손가락을 가져다 대었다. 하지만 오래도록 손가락에 머물던 그 오일 냄새는 희미해져 자취를 감춘 지 오래였다.


  “케이.”


  아무 대답도 돌아오지 않았다. 그저 텅 빈, 공허함 울림만이 카게야마의 뒤를 메울 뿐. 하지만 카게야마는 뒤돌아보지 않았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츠키시마가 부탁했던 대로 그렇게, 보이지 않는 것―완전한 사랑―을, 하나가 된 세상에서 찾고 싶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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